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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뉴스

“그 시대 가장 이상적인 사람의 얼굴이 불상”

등록 2007-10-02 13:57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펴낸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

인도·중국·한국 관통하는 불교미술 아우른 대작“우리 미술도 외국서 공부” 비판‘부처머리 고둥껍질’ 어릴적 의문이 연구 출발점

누구는 어느 무엇보다 돈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이성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며, 누구는 술을 더 좋아한다. 또 누구는 산이나 강을 찾는 것을 즐기며, 누구는 진리와 함께하는 것을 즐긴다. 누구나 그가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를 알 수 있다.

서울시 성북동 97의1. 울창한 숲 속에 있는 간송미술관 내 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65)의 처소 밖은 꽃으로 둘러싸여 있다. 온통 꽃과 나무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답답하기보다는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길이 언제나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 실장의 처소가 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개나리 잎사귀 같은 부리를 흔들며 종종거리는 새끼 새 30여 마리가 달려든다. 최 실장이 부화시킨 공작 새끼들이다. 고서와 고미술품 속에서 누렇게 떴을 법한 그의 얼굴이 공작처럼 고고하면서도 꽃처럼 생기 있는 이유를 이들이 말해준다.

그가 이번에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대원사 펴냄) 1·2·3권을 완간했다. 불상이 없었던 초기 불교와 불타의 자태가 불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5세기 간다라 시대 이래 인도와 중국, 한국을 관통하는 불교미술을 아우르는 대작이다. 지난 30년 간 서울대와 연세대 등에서 일제의 식민지를 거치며 우리 역사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걸려버린 지성을 깨워온 내용들이다. 그는 책 머리말에서 “제 나라 역사를 모른다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고 제 나라 역사를 기록해놓은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면 이는 문맹이며, 이래서는 자신의 권위와 존엄성을 지켜내기 어렵다”고 했다. 우리나라 역사와 사상조차 제나라에서 공부한 사람은 주눅이 들고 외국에서 학위를 받아야 행세하는 풍토에서도 식민사관으로 공부한 노학자들과 외국 박사들이 강조하는 문화를 변방문화로 몰아쳐버린 그의 결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도와 중국의 불상을 이토록 상세히 다룬 그가 우리나라 밖을 한 발짝도 나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미술사 공부도 미국에서 해야 되는 줄 아는 풍토가 싫어서 이 땅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그였으니 인도와 중국도 가보았을 리 만무하다.

앉아서 천리, 만리를 본다는 고언이 허언이 아닌 것일까. 이 책은 일찍이 중국의 돈황 석불은 물론 인도의 아잔타 석불까지 샅샅이 살핀 기자보다 더 깊게 본 ‘불상 관람기’가 아닌가. 역시 불교에선 눈보다는 마음이다. 심미안만이 불상을 바로 볼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어느 스님 못지않게 ‘불(佛)’, 한 우물을 깊게 파지 않았던가.

그를 보고 “나는 속인 같은 중인데, 선생은 출가자 같은 속인이구려”라고 했다는 어느 선승의 말대로 그는 출가하지 않았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며 불타와 함께 해왔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국립박물관 학예사로 근무하던 그가 41년 전인 1966년 간송미술관에 몸을 담은 것도 당시엔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신수대장경 100권이 꽂혀있는 것을 보고 이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와 불교의 인연은 그보다 훨씬 전이다. 경허-만공의 선기가 어린 수덕사가 있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부터 자기 집의 원찰인 보덕사에 드나들며 자랐다. 만공-보월선사의 뒤를 이어 보덕사를 이끌던 비구니 선맥의 태두 법희 선사와 그 제자들의 법비 속에서 그도 한 뼘 한 뼘 자랐다. 그가 불상에 관심을 갖게 돼 결국 이 책까지 쓰게 된 것도 열 살 때 보덕사에서 불상의 상투를 보고 “왜 부처님의 머리에 작은 고등껍질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여 놓았을까”란 의문으로부터 출발했다.

불상은 열 살 전, 아니 현생 전부터 그와 함께 했는지 모른다. 그는 열일곱 살 되던 해 겨울 해질녘에 개심사에서 보덕사를 향해 깊은 산을 넘다 지쳐 쉬던 중 꿈결처럼 9척 장신의 비구승을 만난 뒤 산을 훌쩍 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이 있었다. 또 대학 1학년 때 답사를 위해 전남 순천 송광사에 갔을 때 한 발작 들어설 때마다 오랫동안 살았던 고향처럼 더욱 더 익숙해졌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가 60년대 말 송광사의 불화 정리 작업을 하고, 새로 모실 불상들을 감수한 것도 알 수 없는 인연의 힘에 의해서였다.

그의 고향집 같은 송광사는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이자 계율이 엄정하기로 이름난 곳이다. 그러나 송광사에도 그런 스님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정조 때 평생 술을 벗 삼아 산 풍암 스님은 술독으로 죽어가면서도 “유주(有酒·술이 있는) 지옥을 갈지언정 무주(無酒·술이 없는) 극락은 안 간다”고 했다. 책과 그림 속에 묻혀 살면서도 그의 처소를 찾는 객들과 함께 맥주를 사발 가득히 부어 돌려마시기를 즐겨하는 그는 풍암의 후신인 것일까.

그가 반기는 객이 찾아오는 날이면 각자의 사상과 문화는 그의 맥주 사발 속에서 녹아 함께 홍단청으로 붉게 무르익는다. 모든 계통의 불상들이 그가 유라시아 문명의 꽃으로 자부하는 이 땅으로 흘러들어 꽃을 피운 것처럼.

그는 “그 시대 가장 이상적인 사람의 얼굴이 바로 불상”이라고 했다. 석굴암 불상은 당시 신라 성덕왕의 얼굴이며, 조선시대 약간 구부린 모습의 불상들은 선비들이 단정히 앉아 글을 읽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불상들을 한 코에 꿴 그는 앞으로 어떤 불상을 빚어낼까.

홍단청을 하고 그의 처소를 나서니, 화단 속 돌부처가 꽃과 함께 피어나며 공작 새끼들의 재롱에 미소짓고 있지 않은가.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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