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한 채 주변 강국의 것만을 우상시하는 사대주의 사가들에 의해 우리 것이 폄하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특히 민족 종교는 우리 민족의 사상과 정서를 대변했지만 일제를 거치며 유사종교나 사이비종교로 알려지게 됐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서울대 윤이흠 명예교수(종교학과)가 〈일제의 한국 민족종교 말살책〉(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에서 그 실상을 밝혔다.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종교는 천도교와 보천교, 대종교다. 천도교는 개신교 신자가 불과 20만 명에 불과했던 1920년대 신자 300백만 명이었을 만큼 이 땅의 대표 종교였다. 또 보천교도 한 때 수백만의 신도를 자랑했다. 대종교도 만주 일대에서 수많은 민족학교를 세워 민족혼을 되살려냈다. 그러나 일본 불교를 등에 업은 불교와 미국과 유럽 등 제국의 지원을 받는 개신교, 가톨릭과 달리 민족종교는 이 땅의 힘없는 민중 외엔 기댈 데가 없었다. 그래서 일제는 가톨릭, 개신교, 불교는 ‘종교’로 예우했지만, 민족종교는 ‘유사 종교’ 취급을 하면서 분열시키고 탄압해 철저히 무너뜨렸다.
그것은 한민족의 정신을 담은 민족종교들이 민족운동의 원천이고 고갱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한반도에서뿐 아니라 민족종교가 쫓겨 간 만주지역까지 쫓아가 민족종교를 탄압했고, 거대한 민족종교들은 내부 분열이 일어나도록 원격 조정해 와해시켰다. 당시 신문들도 일제의 인식에 동조해 민족종교들을 유사종교로 여겼다.
일제는 3·1운동 뒤 최대 종교였던 천도교를 최린 등 일본 유학생 출신의 요인들을 포섭해 분열시켰다. 또한 이른바 혁신 세력을 통해 종교단체에서 민중교회와 사회개혁운동 단체로 전향하도록 유도해 영성적 권위를 잃고 사회문화운동단체의 성격을 띠게 했다.
또 일제는 보천교와 손을 잡고 결성한 시국대동단 활동을 도우면서 보천교의 친일을 유도해 보천교를 민중으로부터 격리시켰고, 대종교의 경우 1942년 3세교주 윤세복 등 20명의 교단간부를 체포해 이 가운데 10명이 옥사케 해 사실상 교단 자체를 와해시켰다.
지은이는 우리 사회에서 사교와 공포의 표본으로 여기는 백백교의 경우도 일제의 말살책과 조작으로 인한 것일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조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