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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뉴스

무애 선승 춘성 ‘거침없는 무소유’

등록 2009-03-17 21:00

알몸 드러낸 선지식의 삶

지인들 증언 담아 오롯이

춘성(1891~1977)이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에 함께 탄 목사가 기독교를 믿으라면서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했다. 춘성이 물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없는 데가 없다는 말이냐?”

“그러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

이 말을 들은 목사는 춘성을 노려보면서 “감히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쓴다”고 화를 내며 물었다.

“부처님도 없는 데가 없느냐?”

“없는 데가 없지!”

“그러면 부처님도 똥통 속에 있겠네?”

“똥이 부처님인데 똥통 속에 있고 말고 말할 것이 뭐 있어?”

<춘성>(새싹 펴냄)에 나오는 일화다. 일화 그대로 거칠 것이 없는 무애도인으로 선승들의 지대방에서 늘 회자되던 <춘성>의 삶을 저자 김광식 박사는 그와 인연 있던 이들의 세세한 증언을 통해 되살려냈다.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상좌이자 대선사 만공의 법제자였던 춘성은 허위의식 없이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 선지식이었다. 남이 보든 보지 않든 맥주 한 잔 시원스레 들이켜고 영화관에 드나들면서도 절에서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철저한 수행자였다. 자신은 물론 그 누구도 이불을 덮지 못하게 하며 오직 수행 정진했고, 오직 옷 한 벌 외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했다. 그래서일까. 선(禪)-교(敎)를 함께 절차탁마하며 현대의 고승들과 함께 수행 정진했던 전 조계종 교육원장 무비 스님은 “목에 총을 들이대고, 선지식 한 명을 고르라면 춘성 스님을 꼽겠다”고 했다.

또 60년대 도봉산 망월사에서 6년간 춘성을 시봉한 뒤 많은 선지식을 봐온 서광사 주지 수명 스님은 “근래에 우리가 말하는 큰스님들은 제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대부분은 대접을 받고, 독방에 보약을 쌓아 놓고서 사셨지만 춘성 스님은 평생을 독방에 가지 않은 채 대중들과 똑같이 큰방에 살며 수행했다”고 전했다.

어디를 가나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도량석을 할 정도로 자신에겐 철저했던 춘성은 대중들에겐 자비보살이었다. 당시만 해도 오지였던 도봉산에 등산 와 위험한 계곡에서 잠을 청하는 등산객들을 찾아다니며 “비가 와 계곡물이 불어나면 꼼짝없이 죽게 된다”며 절로 불러와 잠을 재우곤 했다. 또 아무런 격의없이 육두문자를 쓰면서도 마음이 동하는 법이 없었고, 남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덕숭총림 유나 우송 스님은 “수좌들이 스님 앞에 가면 거울 속에 내 속이 다 비치는 것 같아 앞에 가선 놀았다든가, 삐쳤다든가, 딴생각하고 있었다면 한없이 부끄럽고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노장(춘성)님 앞에선 딴짓을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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