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스님 ‘맑은 바람 드는 집’
“여름 안거를 시작한 지 보름, 그럭저럭 결제 대중이 쉰 명 남짓입니다. 서로 얼굴 마주할 일이라야 세끼 밥 먹을 때뿐입니다. 공양을 위해 큰방에 빙 둘러앉은 쉰 가까운 대중들의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나날이 푸르름을 더해가는 숲을 바라보는 기분입니다. 부디 저들의 한철 살림살이가 숲과 같기를, 안거가 끝나는 날 더욱 깊어진 저들의 눈빛을 볼 수 있기를!”
경북 김천의 직지사 성보박물관 홈페이지(jikjisa.or.kr)에 가보면 박물관장 흥선(53) 스님이 소개한 맑은 한시와 음악이 신선한 솔바람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1974년 출가해 해인사 강원과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해 금석학과 문화재에도 조예가 깊은 흥선 스님은 맑은 얼굴만큼 맑은 한시 170여수를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 한시들과 그의 해설이 <맑은 바람 드는 집>(아름다운인연 펴냄)이란 이름으로 출간됐다.
‘이른 아침 죽을 뜨고…’라는 나옹 선사의 한시 ‘신령한 구슬’을 자신의 노트에 적은 흥선 스님이 ‘새벽 5시50분 세 번 죽비 소리가 울린 뒤 되직하게 끓인 죽 한 바루를 받아든 기쁨’을 찬미한 대목에서도 다시 산승의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돌아서면 배고파지는 것이 죽이라고 합니다만, 그래서 가난한 시절을 겪은 어르신들은 외면하기 일쑤인 음식이 죽이긴 합니다만, 요즘처럼 먹을 것 넘쳐나 도리어 탈인 세상에서는 쉬 출출해지는 점이 오히려 미덕입니다. 내 몸의 어딘가에 가득 차지 않은 여백이 생겨난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실감나면서 티미하던 머리는 한결 명징해집니다. 그 빈 느낌이 좋습니다. 그럴 때 저는 헛헛한 기분을 즐기면서 비어 있을 때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짐을 체감합니다. 대저 자유는 비어 있음에 깃듦이 예사인 모양입니다. 죽은 채우기가 아니라 비우기를 가르치는 음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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