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선사
올해는 경허 선사(1849~1912·사진)가 입적한 지 100돌이다. 경허는 조선 500년 동안 억불숭유로 인해 맥이 끊기다시피 한 선(禪)을 되살려낸 근대 선의 중흥조다. 원효, 보조 지눌 등과 함께 한국 불교 최고의 선지식으로 꼽히는 인물이다.그는 주색잡기를 가리지 않는 ‘막행막식’ 일화로도 유명했다. 주색잡기에 취한 승려들은 그를 팔아 자신의 행실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그래서 경허는 언행에 걸림이 없는 ‘최고의 선사’란 찬사와 함께, 한국 불교의 파계 관행을 조장한 파계승이라는 비판이 함께한다.그런데 <불교평론> 가을호에 불교 출판을 이끌어온 민족사 출판사 윤창화 대표가 ‘경허가 주색잡기를 참회했다’는 글을 발표했다.윤 대표는 경허의 수제자인 만공과 한암의 글 등으로 보아 경허가 막행막식을 한 것은 사실로 보았다. 만공(1871~1946)은 ‘경허 법사의 입적 소식을 듣고 읊다’라는 시에서, “선(善)은 부처를 능가했고, 악은 호랑이를 능가했으니, 그분이 바로 경허 선사이시다. 열반하셨으니 어디로 가셨는가? 술에 취해 꽃처럼 붉은 얼굴로 누워 계시네”라고 했고, 법제자 한암(1876~1951)은 ‘경허화상행장’에서 “선도 끝까지 이르렀고 악도 끝까지 이르렀다”며 “법을 따르는 것은 좋으나 행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일제 때 김태흡이 쓴 <인간 경허>에 등장하는 구례 화엄사 강백 진진응과 경허의 대화에서 주색잡기에 대한 경허의 변은 다음과 같다고 윤 대표는 전했다. 경허가 진진응과 마음이 통해 수도암에 머물면서도 주색잡기에 탐닉하자, 진진응은 ‘해인사의 인파화상 같은 이는 일평생 색을 멀리하고 동지섣달 설한풍에도 학인들을 마루에 앉히고 글을 가르쳤는데, 화상은 대사라는 분이 그만한 것을 제어치 못하니 어찌 후생의 사범이 되기를 기약하겠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경허 대사가 얼굴에 홍조를 띠고 “내가 출가했던 청계사는 당취승(처가 있는 승려)의 소굴로서 뭇사람들이 주색에 빠진 것을 어려서부터 보고 들어 이 습관이 본성이 되어서 그칠 수가 없게 되었다”고 답한다.경허가 말년에 종적을 감추고 함경도 삼수갑산에 은둔해 있다 입적한 것도 행실에 대한 후회 때문이었다고 윤 대표는 분석했다. 윤 대표는 “경허 입적 100년을 맞아 경허의 삶에 대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며 “현대의 수행자들은 경허의 삶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