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 이세종선생 생가터에서 지팡이를 짚은 한영우씨(오른쪽)가 김성인씨 나기백 단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07년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10만여명이 모인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성회’에서 서울 사랑의교회 옥한흠(1938~2010) 목사는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입만 살아 있고 행위는 죽은 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고 눈물로 회개했다. 옥 목사는 “목사가 설교를 조금씩 변질시키는 사이 청중은 귀에 듣기 좋은 말씀만 선호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 모두가 ‘아멘’ 하고 열광하는데,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하면 얼굴이 금방 굳어지고 예배 분위기도 싸늘해져, 저도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만 골라서 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옥 목사의 말대로 믿음을 강조하는 대신 ‘행위’를 상대적으로 폄하하는 동안, 대형교회 유명 목사들의 부도덕과 비리 도미노로 한국 교회는 신뢰를 적지않게 상실했다. 이런 가운데 말보다는‘행위’의 삶을 살다간 한국 교회 초기 선지자들을 재발굴하려는 노력이 가시화하고 있다.
서구 신학을 공부하는 데만 신경을 쓰던 데서 벗어나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와 한국기독교연사연구소가 이덕주 감신대 교수와 함께하는 ‘초기 한국 기독교 유적지 시민 답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도 ‘행위의 선구자들’을 재조명하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노력이 광주·전남 지역에서 두드러진다. 우리나라에서 영남지역은 불교세가 강한 데 반해, 호남지역에선 기독교세가 두드러지는 특성을 보인다. 호남 지역의 기독교 부흥엔 ‘행위’로서 지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초기 선지자와 영성가들이 있었다.
광주기독교청년회(YMCA)가 나환우와 걸인들의 아버지였던 오방 최흥종(1880~1966) 목사를 기리기 위해 ‘오방상’을 제정하는 등 기념사업을 벌인 데 이어, 이세종(1880~1942)과 이현필(1913~63)을 기리는 사업이 활발해지고 있다.
전남도 문화재예방관리센터는 지난 11일 ‘성자 이세종 선생 기념 사업 학술토론회’를 연 데 이어 전남 화순 도암면 등광리의 이세종 생가 터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세종은 머슴살이를 지낸 농부로 부자가 된 뒤 한글을 깨쳐 나이 40살에 홀로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 모든 재산을 털어 구휼하고, 금욕·금육·금식의 절제된 삶을 실천하며, 호남의 대표적 영성가들을 길러낸 인물이다. 1930년대 박형룡·김재준과 함께 한국 신학의 3대 거목으로 꼽히던 정경옥 감신대 교수는 이세종을 만나본 뒤 <새사람>이란 잡지에서 ‘화순의 성자’라고 평했다.
이세종선생 생가터를 찾은 화순지역민들과 동광원 식구들
이세종의 신비한 삶은 이현필과 최흥종, 강순명, 백영흠 등의 제자들로 인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세종의 수제자 이현필은 광주와 무등산 일대에서 6·25 뒤 고아들과 폐병 환자들을 돌봤다. 그는 병자와 고아들을 돌보면서 자신은 푸성귀 외엔 거의 곡기를 입에 대지 않고, 맨발로 눈밭을 걷는 고행을 하여 ‘맨발의 성자’ 또는 ‘한국의 성프란치스코’로 불린다.
그가 설립한 수도공동체 동광원에선 수도자들이 자기 자녀를 고아들 무리 속에 넣어 똑같이 키우고, 음식물은 일절 남기지 않고 하루에 밥 한 끼씩은 더 불쌍한 사람을 돕기 위해 모으자는 일작운동을 펼쳤다. 그의 제자인 김준 초대 새마을연수원원장은 이런 삶을 새마을운동에 도입했다. 가톨릭 광주대교구는 이현필의 영성을 잇기 위해 광주에 독신여성수도원인 ‘소화 데레사 자매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세종 생가터 복원을 추진해온 김성인 전 화순군의원은 “최근 들어 이 선생을 기리기 위한 순례객들이 늘고 있는데, 생가 터에 물이 새고 허물어진 폐가만 남아 있어서 어떤 식으로든 복원이 시급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봉사 차원에서 이세종 폐가 터를 관리해온 전남도문화재예방관리센터의 나기백 단장은 “무소유와 선행과 절제를 몸으로 살다간 이세종의 삶을 알면 알수록 고개가 숙여져 생가를 복원하고 그의 삶을 만화로 만드는 사업을 추진중”이라며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만들고 성자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순례 코스를 만들자는 구상도 있다”고 전했다.
또 이현필의 제자로서 병든 스승을 업고 다니면서 탁발하는 삶을 살다가 스승이 별세한 뒤 평생 이세종의 생가 마을에서 독신 수도자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한영우(83)씨는 “이현필은 동광원에 들어간 사람에게 가장 먼저 다 떨어진 옷과 깡통을 던져주어 걸인 차림으로 탁발을 하게 했다”며 “탐욕만이 넘친 지금이야말로 탁발 정신이 절실해진다”고 말했다. 이현필의 제자들은 스승이 별세한 경기도 벽제 동광원에서 기일인 오는 3월17일 ‘이현필 기념 박물관’의 문을 열 예정이다.
화순/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