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이란 내가 나의 주인공이란 마음의 상태이며, 그 극치는 석가모니가 외쳤다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경지다. 나에게 있어서는, 내가 우주에 있어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자각이다. 나는 객체가 될 수 없는 것이 주체성이다. 객체가 되는 순간 나는 주체성을 상실한다.
주체성이란 주인의식이요, 독립이요, 해방이요, 선택이요, 부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부리는 것이기 때문에, 주체성의 형성 과정은 의존에서 독립, 노예에서 주인으로, 예속에서 해방으로 강요당함이 아니고, 자유로운 선택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주체성의 상실은 이러한 과정에서 어떠한 당시의 나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부딪치게 되어 자기성장을 저해당해서 이루어진다. 건강한 인격은 주체성이 어느 정도 순조롭게 길러진 사람이요, 정신이 불건전한 신경증이나 정신병적 인격은 주체성의 상실자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의 성숙이나 완성이 주체성의 확립이요, 최고의 경지는 도를 깨친 각(覺)의 경지다.
주체성의 침해나 상실은, 주체성의 순조로운 형성에 필요한 외부의 도움이 있어야 할 때 없거나, 없어야 할 때 강압되거나, 간섭과 방해가 심할 때 이것을 이겨 내지 못하면 일어난다. 소화되지 못한 기억들, 만족시키지 못한 욕망들, 해결되지 못한 공포, 이루어지지못한 관계들, 유화(宥和 용서하고 화해)할 수 없는 양심의 요구들, 사용되지 못한 능력들, 불완전한 동일성, 억압된 영적 요구들, 아린 것들이 앞을 가로막고 진전을 방해하고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생의 역사에서 가슴에 걸린 물건, 즉 애응지물(碍膺之物 가슴속에 거리낌, 컴플렉스)이 있어서 주체성이 약화되고 상실되고 길러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주체성이 약화된 사람이 특별한 치료를 받지 않아도 조금씩 회복되는 수가 있다. 부모나 기타 존재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아버지에 심한 의존심과 적개심을 동시에 가진 청년이 군대에 가 있을 동안 자기존재의 위치를 회복하고, 제대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또 원상으로 복귀한다.
요는 나를 구속하는 내적 외적인 힘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야만 주체성이 회복되는 것이다. 주체성이 심히 약화된 신경증이나 정신병의 경우를 보면 신경증의 증상이나 정신병의 증상은 외부로부터 침해해 들어오는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체성을 바로 잡으려는 나, 즉 자아의 힘이 외부의 힘에 억압되어 버려 무의식 속에 깊이 들어가 버렸을 때에 나타난다.
증상이 생긴 뒤에는 본인은 그 힘을 충분히 의식 못하며, 따라서 제어할 수 없게 된다. 나를 구속하는 힘이 아직도 내 밖에 있꼬, 나의 일부로서 내 마음 속 깊이 자리를 잡기 전이면 환경변동을 일으켜 준다든지 치료자의 도움으로 외부의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되면 간단히 회복된다.
그러나 신경증이나 정신병의 경우에는 자아와 구속적인 외부의 힘이 장구한 투쟁의 역사를 겪고 있어서 이러한 과정에서 외부의 힘이 내재화되어 나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에 치료작업은 간단하지가 않다.
치료자의 임무는 환자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 즉 느낌, 생각, 공상, 신체감각 모든 것을 성실하게 보고하게 하며 여하한 구속이나 억압도 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미약하나마 남아 있는 환자의 주체성을 최대한도로 나타낼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마련해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환자는 가슴에 걸려 있는, 주체성을 침해당한 경험을 표현하고 이것을 자각하고 이 힘을 이겨낼 수 있게 된다.
대개의 경우 환자의 현재 상황, 미래의 가능성, 과거의 생활사 전반을 검토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환자는 어떻게 해서 오늘날의 자기가 되었고, 과거는 과거가 되고, 풀리지 않는 과거가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일이 없어지고 현재에 충실하게 되는 상태에 이른다. 즉, 주체성이 회복된다. 환자는 자기의 생활사를 바로잡게 되는 것이다.
이 작업을, 환자가 자신의 내부를 노출시키려 하지 않는 여러가지 저항현상을 분석하고, 치료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전이현상을 분석하고 꿈을 해석한다. 따라서, 주체성의 회복은 자각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고, 선(禪)에서 말하는 애응지물을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애응지물이 생기기 전의 나의 참다운 모습, 즉 본래면목 또는 진면목을 만남으로써 이루려는 것이다.
<한국인의 주체성과 도>(이동식 저, 일지사 펴냄)에서
이동식(1920~)=경북 왜관에서 태어나 대구의전을 졸업했고, 서울 의대, 뉴욕 의대, 수도 의대, 경북 의대, 연세의대, 이화여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한국정신치료학회 명예회장. 국제정신치료학회 이사다. 저서로 <현대인과 노이로제>, <노이로제의 이해와 치료>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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