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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인간과동물

‘세계 북극곰의 수도’엔 가짜 북극곰들만 가득!

등록 2017-09-09 09:00수정 2017-09-09 10:11

[애니멀피플] 북극곰의 나라에서 3회
북극곰의, 북극곰에 의한, 북극곰을 위한 마을에서
나는 북극곰은커녕 벨루가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처칠에 도착하면 ‘세계 북극곰의 수도’를 자처하는 입간판이 자랑스레 서 있다.  이태리 제공
기차를 타고 처칠에 도착하면 ‘세계 북극곰의 수도’를 자처하는 입간판이 자랑스레 서 있다. 이태리 제공
“카메라 두고 갔어?”

하우스메이트 수잔이 감자튀김을 우물대며 돌아봤다.

아니. 야심 차게 마을 구경을 나선 지 단 30분 만에, 나는 탐방을 마치고 산뜻하게 돌아온 길이었다. 30분. 믿기 어려운 시간이지만 이 자그마한 동네를 파악하는 데는 그거면 충분했다.

처칠은 생각보다도 더 작았다.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느긋하게 20분을 걸었더니 어느새 동네를 횡단했다. 나름 역세권이라고 비싼 값을 치르며 살았던 서울 자취방이 역에서 15분 거리였던 걸 생각하면, 이 얼마나 귀여운 마을인가.

공식 인구 약 890명(2016년 기준), 그마저도 공부하거나 일하러 다른 도시에 나가 있는 이들을 빼면 훨씬 줄어든다. 사람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서울에서 살던 내가 몇백 명이 사는 마을의 모습을 그려보기는 쉽지 않았는데, 도착하고 보니 의외로 간단했다. 방금 여기서 만난 사람을 잠시 후 저기서 만나고, 저녁에 또 만나고, 내일도 만나는 것이다. 간혹 격일로 만나면 반갑고, 며칠 안 보이면 어디 갔었냐고 묻게 되는 것. 그렇다. 가깝고 멀고를 떠나 모두가 서로의 존재를 아는, 오지랖의 메카였다.

이 아담한 마을은 그 규모에 비해 꽤 거창한 ‘세계 북극곰의 수도(Polar bear capital of the world)’라는 슬로건을 늠름하게 둘러메고 있는데, 어찌나 그 이름에 충실한지 마을 구석구석 북극곰으로 열심히 채워져 있었다.

기차역을 나오면 빛바랜 ‘북극곰의 수도’ 표지판이 손님들을 맞이하고, 황량한 길가에선 북극곰 모형이, 식당 앞에선 북극곰 모양 간판이, 그리고 건물 안에서는 진짜 북극곰 가죽이 “여기는 북극곰 마을!”을 외친다. 어느 집에는 북극곰 모양 우편함이, 그 옆집에는 북극곰을 신고하라는 안내판이 붙어있고 심지어 마을 곳곳에 비치된 쓰레기통에도 어김없이 북극곰이 그려져 있다. 말 그대로 ‘북극곰의, 북극곰에 의한, 북극곰을 위한’ 마을이랄까.

‘세계 북극곰의 수도’ 처칠에는 정말 북극곰이 많았다.  이태리 제공
‘세계 북극곰의 수도’ 처칠에는 정말 북극곰이 많았다. 이태리 제공

하지만 마을을 점령한 북극곰이 무색하게도, 진짜 북극곰은 아직 ‘마을 근처’에는 없었다.

내가 도착한 7월은 북극권도 절절 끓는 한여름. 마당에서 ‘북극 태닝’이 가능한 시기였다.

겨우내 북쪽으로 떠났던 북극곰들은 6월부터 슬슬 허드슨만의 안식처로 쉬러 오는데, 이맘때면 체력을 아끼기 위해 바다에서 몸을 식히거나 바위에서 늘어지게 ‘여름잠’을 잔다.

집 앞에 북극곰이 있다느니, 사람보다 북극곰이 많다는 말은 아직 먼 나라 얘기였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곰이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니 마을 경계 부분을 다닐 땐 늘 조심해야 했다. 마을 밖으로 나갈 땐 북극곰 총(공포탄), 휴대용 사이렌 등을 챙기거나 베어 가드를 동행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몇십 년간 북극곰과 함께 살며 ‘북극곰 박사’가 다 된 마을 사람들은 외부인들에게 이런 내용을 숙지시켰다. 마침 벨루가를 보러 갔다가 ‘북극곰 주의’ 표지판에 지레 겁먹고 슬금슬금 돌아왔던 나는 쾌재를 불렀다. 총 없이도 벨루가를 보러 갈 수 있구나!

벨루가가 지척인데

곰이 ‘아직’ 없다는 걸 안 뒤부터 나는 바닷가 망부석이 됐다.

집 바로 뒤, 주거지역에서 도보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벨루가가 사는 바다와 강이 있다.

그곳에서 넘실대는 벨루가의 하얀 등을 보는 게 내 유일한 낙이었다. 처칠에 오기만 하면 매일같이 벨루가와 카약을 타고 노래할 줄 알았건만! 어언 2주 째, 나는 초과시간까지 찍는 베스트 노동자가 되어있었다. ‘아무 일이나 맡겨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어요!’ 외친 게 화근이었다. 대체인력이 없어 단 하루도 쉴 수 없는 일이 내게 맡겨졌다. 행운 아니면 지옥행이겠거니 했던 고속채용의 실체는 역시나 노동지옥행 급행열차였던 것이다.

처칠 앞바다에는 벨루가(흰고래)가 산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처칠 앞바다에는 벨루가(흰고래)가 산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점입가경으로, 내 일이 끝나면 벨루가 투어도 끝났다. 벨루가를 만나는 투어는 주로 따뜻한 오전과 점심때 진행된다. 오후 4시가 넘어야 퇴근하는 내겐 그림의 떡이었다. 종종 조수 시간에 따라 오후와 저녁에도 투어가 있었지만, 그런 날은 얄궂게도 예약이 꽉 차 있었다. 혹은 폭우가 쏟아져 취소되거나. ‘스태프 무료 투어’라는 미끼는 내게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오늘 자리 있어?” 문의할 때마다 들려오는 절망스러운 답,

“쏘리, 게스트 퍼스트 (손님 우선)!”

돈을 내고라도 참여하려 했지만, 하늘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북극권에 속하는 처칠의 날씨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맑다가도 삽시간에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려오는데, 하루 한 번에서 많아야 두 번인 물때에 어찌나 귀신같이 찾아오는지 배를 띄우지도 못하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북쪽 마을의 일기예보는 양치기 소년의 피리 소리처럼 누구도 믿지 않았다.

나는 바짝바짝 말라갔다. 일찍 얼어붙는 허드슨 만을 떠나서 8월 중순 이후 벨루가는 이동을 시작한다. 얼지 않는 또 다른 북녘 바다로. 북극 마을의 온갖 변수 사이에서, 내게 주어진 한 달은 전혀 긴 시간이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어느새 보름뿐.

허드슨만 앞바다에 있는 이눅슉. 그린란드에서 캐나다, 알래스카 북극권까지 원주민이 먼 길을 갈 때 이정표로 사용했다.   이태리 제공
허드슨만 앞바다에 있는 이눅슉. 그린란드에서 캐나다, 알래스카 북극권까지 원주민이 먼 길을 갈 때 이정표로 사용했다. 이태리 제공
이누이트들이 세운 ‘이눅슉’(사람 모양의 돌 표식)마냥 바다를 향해 못 박혀있던 어느 날.

춤추는 하얀 등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려고 다가갈 때였다.

“이봐, 위험해! 돌아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멋진 카메라와 망원경이 그녀가 관광객임을 말해줬다. 바닷바람에 금발이 산발이 된 그녀는 연신 소리쳤다.

“여기 북극곰 출몰 지역이라고! 얼른 이리와!!”

너무도 다급한 그 손짓에 잠자코 옆으로 갔다.

처칠에 온 지 사흘째라는 그녀는 쉴 새 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오늘 도착했어?”

“아니, 3주째야.”

말을 잊은 그녀가 무안할까, 부러 더 덤덤하게 말했다.

“안심해, 북극곰은 대낮에는 마을 가까이 잘 안 와. 특히 여름에는.”

물론 이곳에도 북극곰이 찾아온다. 그래서 7월이면 이 해변을 비롯한 마을 경계 부분마다 ‘북극곰 경계 표지판’이 세워진다.

해안가를 중심으로 북극곰이 출몰했다. 어김없이 북극곰 경고 표지판이 서 있다.  이태리 제공
해안가를 중심으로 북극곰이 출몰했다. 어김없이 북극곰 경고 표지판이 서 있다. 이태리 제공
하지만 환한 대낮에, 마을 바로 옆의 모래사장에 북극곰이 나타날 확률은 아직 낮았다. 북극곰은 똑똑한 동물이다. 반복된 학습의 효과로 웬만해선 밝은 시간에 마을을 찾아오지 않는다. 물론, 가끔 예외는 있지만.

남들은 3일이면 떠나는 이 작은 마을에 3주나 머무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그녀에게 나는 ‘영혼의 동물’ 벨루가를 찾아온 이야기와 여태껏 만나지 못한 슬픔을 전했다.

“만나러 가면 되잖아.”

“만나러 갈 수 없어.”

“아니, 갈 수 있어. 넌 당장 내일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배를 탈 수 있어. 아직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야.”

그녀의 말이 맞았다.

“우울할 것 없어, 아무것도 안 끝났잖아. 고향에 살면서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투성인데, 난생처음 온 곳에서 전부 계획대로 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지금까지 계획대로 안 됐다고 앞으로도 그러리란 법도 없고.”

그랬다. 나는 어느새 내 계획에 갇혀있었다.

“아직 일을 안 그만둔 걸 보면, 너도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야? 슬퍼하지 마, 기회는 아직도 잔뜩 남았잖아. 지금 막 처칠에 도착했다고 생각해. 그렇게 오고 싶었던 바다에 와 있다고. 너도, 벨루가도!”

그녀의 말대로 나는 처칠에 있다. 그리고 내일도 모레도, 다음 주에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도, 벨루가도. 당장에라도 바로 옆 자갈 밑에서 북극곰이 튀어나올 것처럼 두리번거리는 그녀와 바닷가를 걸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벨루가는 아직 그곳에서 춤추고 있었다.

이태리 북극곰 수도 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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