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계살리기 범시민 투쟁위원회 소속 주민들이 도계역 앞에 설치된 천막농성장에서 단식농성을 하며 화력발전소에 사용되는 석탄 가운데 국내산 비율을 높여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미세먼지 저감을 위해 석탄 소비를 줄이겠다는 정부 입장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국민인데 살길은 열어줘야죠.”
지난 9일 강원도 삼척시 도계역 앞에서 만난 전직 광부 김기호(가명·52)씨가 하소연했다. 김씨는 “석탄이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졸지에 죄인이 된 기분이다. 이제는 애써 석탄을 캐도 팔 곳이 없다”고 푸념했다. ‘막장 인생’이라 자조하면서도 산업 전사라는 자부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탄광 노동자에게는 돌아가는 모든 상황이 암울해 보였다. 도계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자신도 광부가 됐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조처 이후 폐광이 줄을 이었고, 탄광지역 경제는 곤두박질쳤다. 많은 동료 광부들이 일자리를 잃고 지역을 등졌다. 하지만 탄 캐는 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김씨는 막장을 떠나지 못하고 지하 수백미터의 좁은 갱도 안에서 석탄과 30여년을 씨름했다. 지난 30년 동안 이런 일을 겪어온 그에게 정부의 ‘탈석탄 정책’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는 거센 감원 바람 속에 사실상 ‘구조조정’당했다. 도계에서 김씨와 같은 시기에 일을 그만둔 탄광 노동자만 130여명에 이른다.
“뜨거운 열기 탓에 3시간만 있으면 옷이 땀에 흠뻑 젖고, 흘러내린 땀으로 장화에 물이 찰 정도입니다. 그 고생을 하며 지금껏 버텼는데….”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박치석 도계살리기 범시민 투쟁위원장이 도계역 앞에 설치된 천막농성장에서 화력발전소에 사용되는 석탄 가운데 국내산 비율을 높여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도계는 국내 최대 석탄 생산지다. 2018년 석탄 생산계획을 보면, 국내 석탄 생산량 122만7000톤 가운데 64.3%인 79만톤이 도계에서 생산될 정도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탄광 5곳 가운데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인 경동과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등 2곳이 도계에 있다.
도계 주민 1만2000여명 가운데 탄광 노동자는 1500여명이다. 가족(4인 가족 기준)까지 더하면 도계 인구의 절반인 6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여기에 탄광에 물건을 납품하고 노동자를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까지 고려하면 주민 대부분에게 탄광은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폐광은 곧 도계의 사망’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박치석 도계살리기 범시민 투쟁위원장이 화력발전소에 사용되는 석탄 가운데 국내산 비율을 높여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사진은 석탄산업 합리화 조처 이후 도계를 떠난 광부들이 머물던 사택이 흉물스럽게 방치된 현재 모습.
하지만 정부가 탈석탄 드라이브를 가속화하면서 근근이 버티던 도계 탄광 2곳은 판로가 꽉 막혔다. 먼저 서천화력발전소가 지난해 6월 문을 닫았다. 영동화력도 지난해 7월 에너지원을 석탄에서 우드펠릿으로 전환했다. 지금껏 도계에서 나온 석탄은 대부분 강릉과 서천 등에 있는 화력발전소에 납품했다. 탄광촌인 도계가 존폐의 갈림길에 선 셈이다.
주민들은 국내 석탄화력발전소에서 사용하는 석탄 가운데 수입산 대신 국내산 비율을 늘려달라고 정부에 요구한다. 품질이 좋은 국내산 석탄 사용 비율을 늘리면 미세먼지 발생량도 줄일 수 있고, 국내 석탄산업도 보호할 수 있다는 논리다. 주민들은 도계의 광산이 지금 수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석탄 물량을 17만톤으로, 정부가 연간 50억원만 예산을 편성해 국내산과 수입산의 차액을 보전해주면 문제가 없다고 본다.
주민 강용희(64)씨는 “이대로 도계 탄광이 문을 닫으면 광부 일자리 1500여개와 연관 산업 등 2000개 이상의 일자리가 날아간다. 새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수백억원을 쏟아부을 게 아니라 있는 일자리를 지켜 지역 붕괴를 막는 게 우선 아니냐”고 반문했다.
박치석 도계살리기 범시민 투쟁위원장이 화력발전소에 사용되는 석탄 가운데 국내산 비율을 높여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사진은 석탄산업 합리화 조처 이후 도계를 떠난 광부들이 머물던 사택이 흉물스럽게 방치된 현재 모습.
하지만 정부는 예산 편성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국내산 석탄 비율을 늘리려면 예산 증액이 필요하다”면서도 예산 증액 여부에 대해선 “내년 예산안은 지금 국회에서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말을 아꼈다.
주민들은 격앙돼 있다. 이달 말까지 정부가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대정부 투쟁에 나설 태세다. 주민 일각에선 도계를 지나는 영동선 철로를 점거하고 아이들의 등교 거부도 불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주민들로 구성된 투쟁위원회는 지난달 17일부터 도계역 앞 광장에 천막농성장을 설치하고 릴레이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 3일에는 도계읍 행정복지센터 앞 광장에서 탄광 노동자와 주민 등 1000여명이 모여 ‘도계 살리기 범시민 궐기대회’도 열었다. 주민들이 거리로 나선 것은 17년 만이다. 도계 주민은 대한석탄공사 도계광업소 중앙갱 폐쇄 계획에 반발해 2000년 10월10일에도 영동선 철로를 점거한 바 있다.
도계살리기 범시민 투쟁위원회는 화력발전소에 사용되는 석탄 가운데 국내산 비율을 높여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사진은 도계읍내 곳곳에 걸린 펼침막 모습.
가스업체를 운영하는 주민 김종국(52)씨는 “최근 들어 지역 경기가 나빠진 게 피부에 와닿는다. 장사가 안된다고 가스를 끊고 문 닫은 음식점도 부지기수다. 탄광촌이 자립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호소했다.
박치석 도계살리기 범시민 투쟁위원장이 화력발전소에 사용되는 석탄 가운데 국내산 비율을 높여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사진은 석탄산업 합리화 조처 이후 도계를 떠난 광부들이 머물던 사택의 현재 모습.
박치석 도계살리기 범시민 투쟁위원장이 화력발전소에 사용되는 석탄 가운데 국내산 비율을 높여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사진은 석탄산업 합리화 조처 이후 도계를 떠난 광부들이 머물던 사택의 현재 모습.
도계살리기 범시민 투쟁위원회는 화력발전소에 사용되는 석탄 가운데 국내산 비율을 높여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사진은 도계읍에 있는 석탄공사 도계광업소의 한산한 모습.
글·사진 박수혁 기자
p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