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상 〈오마이뉴스〉 기자가 지난 22일 〈한겨레〉와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최예린 기자
‘대전형무소 4300명 학살사건의 전모.’
1992년 2월. 경북 안동교도소 독방에서 심규상은 <월간 말> 잡지 표지를 보고 놀랐다. 그는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민주자유당(민자당) 당사를 점거한 사건의 가담자로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대전형무소 학살이라….’ 대전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잡지를 들춰보니 기사는 칼질 돼 통째로 사라진 상태였다. 바깥 체육 활동이 있던 어느 날, 교도관이 독방 문을 여는 순간 그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교무과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잘라낸 기사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다. 주지 않으면 제 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난리를 피우자, 교무과장이 “그냥 줘버려” 했다. 어렵게 받아와 읽은 기사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에 있던 수천 명의 정치범과 보도연맹원 등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돼 파묻혔다는 내용이었다. 학살에 직접 가담한 경찰의 “학살 당시 미군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증언도 기사에 담겨 있었다. 심규상이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사건’과 처음 마주한 순간이었다.
골령골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28일∼7월17일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와 대전·충남 지역에서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들이 우리 군과 경찰 등에 의해 골령골에서 집단학살돼 묻힌 사건이다.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했을 때 석방될 가능성을 미리 막는다’는 이유였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여순사건, 제주4·3사건 관련자들도 수용돼 있었다. 1차 학살(6월28∼30일) 1400여명, 2차 학살(7월3∼5일) 1800여명, 3차 학살(7월6∼17일) 3800여명 등 7천여명이 집단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9월 영국 일간지 〈데일리워커〉의 한국 특파원 앨런 워닝턴은 “커다란 죽음의 구덩이를 따라 창백한 손, 발, 무릎, 팔꿈치 그리고 일그러진 얼굴, 총알에 맞아 깨진 머리들이 땅 위로 삐죽이 드러나 있었다”고 학살 직후 골령골 현장을 묘사했다. 이들이 묻힌 30∼180m 구덩이 8곳을 연결하면 길이가 1㎞에 달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으로 불린다.
50년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7천여명
골령골서 군·경찰에 학살·암매장
92년 교도소 수감중 기사 보고 충격
20년 넘게 진상 규명, 언론에 기사화
진실위·행안부 유해발굴로 이어져
최근 발간 백서에 기사 90여개 실어
“진상 밝혀도 한·미 정부 사과 없어”
심규상은 1992년 12월 만기 출소 뒤 ‘민주주의민족통일대전충남연합’ 활동가로 일했다. 단체 정책실장이 된 1995년 그는 삽과 호미를 들고 골령골로 향했다. 땅을 조금 파자 흡사 나뭇가지 모양의 사람 뼈가 쑥 뽑혔다. 밭 여기저기에 수십 개의 사람 이도 흩어져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거기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면서도 “경찰이 누가 그 일에 대해 물으면 신고하라 했다”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3년 전 기사 내용이 사실임을 확신했다. 그러나 단체 차원의 공론화는 쉽지 않았다. ‘신공안정국’ 분위기 속에서 단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내부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기획실장으로 있던 1999년 그는 다시 골령골에 주목했다. 그해 9월 ‘노근리 사건’이 세상에 크게 알려진 뒤였다. 단체 산하에 ‘대전형무소집단학살사건진상조사반’을 꾸려 본격적인 조사에 나섰다. 학살을 목격한 지역 주민들과 사건에 가담한 형무소 경비대원 등을 인터뷰했고, 그 결과가 2000년 2월 〈월간 말〉에 실렸다. 앞서 1999년 12월 이도영 박사가 미국 기록관리청(NARA)에서 발굴해 공개한 18장의 골령골 학살 현장 사진과 기록도 이 사건을 공론화하는 도화선이 됐다. 그는 대전·충남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대전형무소산내학살진상규명위원회’를 꾸려 진상 규명 활동을 이어갔다. 2001년 오마이뉴스 기자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골령골 진실 찾기’는 계속됐다. 그의 주도로 유족 모임을 결성하고 해마다 골령골 희생자 위령제도 열었다.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출범하자 골령골이 유해발굴 대상지에 포함되도록 노력했고, 2007년 7월 첫 골령골 유해발굴이 진행됐다.
“폭 3m, 길이 7m 구덩이에서 29명의 유해가 한꺼번에 나왔어요. 다리, 팔, 깨진 머리뼈가 모두 에이포(A4) 종이 안에 들어갈 정도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됐어요. 쪼그려 엎드린 상태로 뒷머리에 총을 쏜 거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했습니다.”
2021년 9월10일 골령골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들 모습. 최예린 기자
그는 진실화해위에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모두 제공했고, 위원회와 유족을 중개하는 역할도 했다. 그 결과 2010년 7월 진실화해위의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조사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는 희생자 유족이 국가 상대 소송을 하는 주요 자료가 됐고, 2014년 8월 일부 유족들은 정부로부터 위자료 지급 판결을 받았다.
2016년 8월 정부는 골령골을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위령시설’ 대상지로 정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지자체와 골령골 토지주, 주민들을 설득했다.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는 위령시설 설립의 전 단계로 2020년 2월부터 2022년 12월까지 3년 동안 골령골 유해발굴을 진행했다. 그 결과 1441구 유해와 3177점의 유품이 발굴됐다. 심규상 기자는 최근 산내 골령골백서발간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지금까지 밝혀진 골령골 사건의 진상과 운동 과정 등을 담은 백서를 발간했다. 백서에는 그가 쓴 90개의 기사도 함께 실렸다. 그의 골령골 관련 기사 중 3분의 1 정도만 책에 담겼다. 현재 대전산내골령골대책회의 정책위원장과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명예이사를 맡은 심 기자는 지난 22일 〈한겨레〉와 만나 “사건의 진상이 상당 부분 밝혀졌지만, 아직 누구도 거기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도 미국 정부도 학살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있어요. 군과 경찰도 유족을 위로하거나 사과한 적이 없죠. 골령골은 전쟁의 폭력성과 참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에요. 과거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평화도 가능합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