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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좌파여 ‘식인 자본주의’에 대항하라, 어떻게?

등록 2023-02-10 05:00수정 2023-02-10 10:43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낸시 프레이저 지음, 장석준 옮김 l 서해문집 l 1만9500원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76)의 이론적 열쇳말로는 정의·인정·분배가 꼽힌다. 정의를 중심에 두되 인정과 대표로 정의를 보완하는 삼차원적 이론이 프레이저의 정치사회이론이다. 프레이저는 1990년대에 존 롤스의 분배 중심 정의론의 한계를 비판하며 여성·흑인·성소수자 운동의 문화적 정체성 인정 요구를 수용해 ‘정의와 인정의 공존’을 뼈대로 삼은 새로운 정의론을 제시했다. 이어 사회적 불의를 바로잡으려면 반드시 정치적 대표를 통해 만인의 동등한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는 대표론을 추가함으로써 정의와 인정과 대표가 각각 제 구실을 하는 삼차원적 정의론을 세웠다. 2010년대에 들어와 프레이저는 자신의 정의론에 기초해 정치사회 현실에 개입하며 신자유주의 이후 대안을 찾는 작업에 몰두했다. 미국에서 지난해에 나온 <좌파의 길: 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사회운동과 좌파정치가 자기혁신을 이루려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신조를 바탕에 놓고 쓴 저작이다.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국 정치철학자 낸시 프레이저. 위키미디어 코먼스

프레이저의 문제의식은 이 책의 부제에 담긴 ‘식인 자본주의’(cannibal capitalism)라는 말에 요약돼 있다. 자본주의 체제가 그 탄생 시점부터 사람을 먹어치우는 ‘식인성’(cannibalism)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은 더 논의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프레이저는 이 사실의 메타포를 크게 확장해 ‘식인성’을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핵심 어휘로 삼는다. 먼저 ‘식인’은 자본가 계급의 노동 착취와 식민지 수탈을 가리킨다. 둘째, 식인의 동사형(cannibalize)에는 ‘어떤 설비에서 부품을 떼어내 다른 설비를 만들거나 유지하는 데 쓴다’는 파생적 의미가 있다. 프레이저는 이 의미를 살려 자본주의 경제가 제 배를 채우려고 ‘비경제적 주변 영역’ 곧 가족과 공동체와 생태계의 피를 빨아먹는 현실에 적용한다. 셋째, 식인의 동사형에는 ‘블랙홀이 중력으로 다른 물체를 흡수한다’는 의미도 있는데, 이런 의미의 식인은 중심부 자본이 세계체제 주변부의 자원과 자산을 빨아들이는 행위를 가리킨다. 자신을 지탱해주는 사회·정치·자연의 토대를 먹어치우는 자본주의 체제는 제 꼬리를 먹으며 자멸하는 신화 속 뱀 ‘우로보로스’를 닮았다.

프레이저가 말하는 ‘식인 자본주의’는 바로 이 네 가지 차원을 모두 속성으로 거느린 현재의 자본주의를 말한다. 이 식인 자본주의는 단순히 경제 영역에서만 이윤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경제 영역 바깥의 사회적 영역도 무자비하게 수탈한다. 그 결과는 전 지구적인 삶의 위기, 생태계의 위기다. 이 식인 자본주의를 그대로 두어서는 재앙과 종말을 피할 수 없다.

프레이저는 이런 식인 자본주의에 대항하려면 기존의 계급 착취에만 시선이 머물러서는 안 되며, 젠더 지배와 인종적·제국주의적 억압까지 포괄하는 큰 틀의 시야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기존의 계급투쟁에 더해 식인 자본주의 체제의 ‘접합 부위’에서 벌어지는 ‘경계투쟁’을 조직화해야 한다. 프레이저가 말하는 ‘경계투쟁’이란 돌봄·인종·제국을 둘러싼 투쟁을 말한다. 이 경계투쟁이 계급투쟁과 결합할 때 식인 자본주의에 맞서는 싸움이 효과를 볼 수 있다. 식인 자본주의라는 틀로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수탈 양상을 포괄하는 이론적 시야를 확보함과 동시에, 그 체제의 지배 대상인 모든 계급·젠더·인종이 연대해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것, 이것이 프레이저가 제시하는 반자본주의 투쟁 대안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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