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일/출판칼럼니스트
최성일의 찬찬히 읽기 / <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김영선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2007 어릴 때 세계명작을 얼추 재미나게 읽었다. 계림문고판 세권짜리 <아라비안나이트>는 왜 넷째 권을 엮지 않았느냐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적갈색 표지를 두룬 뒤마의 <암굴왕> 단행본은 뒤로 갈수록 읽을 분량이 줄어드는 게 안타까웠다. 어릴 적 감동을 다시 맛보려 장만한 10권으로 된 <아라비안나이트> 완역판을 두어 권 읽다가 말았다. 여전히 흥미로웠지만 그때 그 맛은 나지 않았다. 엄청난 분량 탓에 <암굴왕>의 원판 또한 읽을 엄두가 안 난다. 우리형님이 조카 녀석에게 사준 450쪽 안팎의 무려 다섯 권에 이르는 <몬테크리스토 백작> 완역본은, 뒤마가 그의 문하생들에게 작품의 일부를 나눠 쓰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실망스러웠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원작이 한권이라 천만다행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 <80일간의 세계일주>와 더불어 내 유년의 모험심을 한껏 부추긴 작품이다. ‘네버랜드 클래식’의 하나로 출간된 <로빈슨 크루소> 완역판은 편집의 완성도가 높고 책의 매무새는 단단하다. 그런데 책을 읽은 느낌은 솔직히 예전만 못하다. 이야기는 여전히 재미있다. 감동이 덜한 것은 다 아는 내용이라서? 아니면, 로빈슨 크루소의 시대적 한계를 알고 있어서 그런가? 후자가 <로빈슨 크루소>를 냉정하게 보게 하는 것 같다. 로빈슨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주종관계는 어릴 적에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소설 모티브를 발견한 것이 완역 읽기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그건 다름 아닌, 로빈슨 크루소가 난파선을 타게 된 계기다. 그는 가욋일로, 아르바이트삼아 노예무역을 하러 배에 오른다. 전에 못 봤던 속죄, 회개, 은총, 신의 섭리 같은 기독교적 덕목이 또한 흥미를 반감시킨다. 로빈슨 크루소가 난파선에서 가져온 물품은 어릴 때보다 훨씬 많지만, 내가 느끼는 풍족함은 그에 못 미친다. 계림문고판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선에서 꺼낸 물품 목록으로 한바닥을 채웠다. 이제 보니 로빈슨 크루소가 28년하고도 두 달을 살았던 섬은 남미 대륙에 가까운 북위 9도 22분에 위치한 대서양의 무인도다. 한계가 없진 않지만 누구도 <로빈슨 크루소>의 가치를 부정하긴 어렵다.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선생존자 무인도정착기의 원형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과학과 계몽이성을 표상한다. 그는 숫자에 민감하고 셈이 밝다. 기록에도 충실하다. 의자와 탁자를 만들면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이성이 수학의 본질이요 근원인 것처럼 모든 것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계산해서 사물을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면,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모든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점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혼자 지내기’의 고갱이를 보여준다. 『로빈슨 크루소』는 지금도 강한 파급력으로 인류 문화를 살찌우고 있다. 새삼스레 1700년대 초반 이 소설이 씌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300년 가까이 읽히는 힘은 굉장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겸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한다. 헐리웃 식 문법이 다소 거슬리는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는 <로빈슨 크루소>의 발상을 빌린 영화다. 로빈슨 크루소는 우리출판사상 초유의 성공적인 단행본 캐릭터로 거듭난다. 그가 바로 ‘노빈손’이다. 최성일/출판칼럼니스트
다니엘 디포 지음. 김영선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 2007 어릴 때 세계명작을 얼추 재미나게 읽었다. 계림문고판 세권짜리 <아라비안나이트>는 왜 넷째 권을 엮지 않았느냐는 아쉬움이 들 정도였다. 적갈색 표지를 두룬 뒤마의 <암굴왕> 단행본은 뒤로 갈수록 읽을 분량이 줄어드는 게 안타까웠다. 어릴 적 감동을 다시 맛보려 장만한 10권으로 된 <아라비안나이트> 완역판을 두어 권 읽다가 말았다. 여전히 흥미로웠지만 그때 그 맛은 나지 않았다. 엄청난 분량 탓에 <암굴왕>의 원판 또한 읽을 엄두가 안 난다. 우리형님이 조카 녀석에게 사준 450쪽 안팎의 무려 다섯 권에 이르는 <몬테크리스토 백작> 완역본은, 뒤마가 그의 문하생들에게 작품의 일부를 나눠 쓰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더 실망스러웠다.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원작이 한권이라 천만다행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 <80일간의 세계일주>와 더불어 내 유년의 모험심을 한껏 부추긴 작품이다. ‘네버랜드 클래식’의 하나로 출간된 <로빈슨 크루소> 완역판은 편집의 완성도가 높고 책의 매무새는 단단하다. 그런데 책을 읽은 느낌은 솔직히 예전만 못하다. 이야기는 여전히 재미있다. 감동이 덜한 것은 다 아는 내용이라서? 아니면, 로빈슨 크루소의 시대적 한계를 알고 있어서 그런가? 후자가 <로빈슨 크루소>를 냉정하게 보게 하는 것 같다. 로빈슨 크루소와 프라이데이의 주종관계는 어릴 적에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소설 모티브를 발견한 것이 완역 읽기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그건 다름 아닌, 로빈슨 크루소가 난파선을 타게 된 계기다. 그는 가욋일로, 아르바이트삼아 노예무역을 하러 배에 오른다. 전에 못 봤던 속죄, 회개, 은총, 신의 섭리 같은 기독교적 덕목이 또한 흥미를 반감시킨다. 로빈슨 크루소가 난파선에서 가져온 물품은 어릴 때보다 훨씬 많지만, 내가 느끼는 풍족함은 그에 못 미친다. 계림문고판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선에서 꺼낸 물품 목록으로 한바닥을 채웠다. 이제 보니 로빈슨 크루소가 28년하고도 두 달을 살았던 섬은 남미 대륙에 가까운 북위 9도 22분에 위치한 대서양의 무인도다. 한계가 없진 않지만 누구도 <로빈슨 크루소>의 가치를 부정하긴 어렵다. <로빈슨 크루소>는 난파선생존자 무인도정착기의 원형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과학과 계몽이성을 표상한다. 그는 숫자에 민감하고 셈이 밝다. 기록에도 충실하다. 의자와 탁자를 만들면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이성이 수학의 본질이요 근원인 것처럼 모든 것을 이성으로 이해하고 계산해서 사물을 가장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면,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모든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점이다.” 로빈슨 크루소는 ‘혼자 지내기’의 고갱이를 보여준다. 『로빈슨 크루소』는 지금도 강한 파급력으로 인류 문화를 살찌우고 있다. 새삼스레 1700년대 초반 이 소설이 씌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300년 가까이 읽히는 힘은 굉장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겸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한다. 헐리웃 식 문법이 다소 거슬리는 톰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는 <로빈슨 크루소>의 발상을 빌린 영화다. 로빈슨 크루소는 우리출판사상 초유의 성공적인 단행본 캐릭터로 거듭난다. 그가 바로 ‘노빈손’이다. 최성일/출판칼럼니스트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