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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권우의요즘읽은책] 책과 창녀의 공통점? 비평가의 재치 가득

등록 2007-08-31 21:02

<일방통행로>
<일방통행로>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 /<일방통행로>발터 베냐민 지음·조형준 옮김.새물결

발터 베냐민의 〈일방통행로〉를 보다가 문득, 그의 글을 짜깁기해 한 편의 글을 써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빛 바래지 않은 문제의식에 눈여겨볼 만한 수사가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데다 잠언성의 발언이 많다 보니 든 생각이다. 그러다 정작 남의 글을 인용해 한 편의 글을 써보고 싶다고 한 이가 베냐민인 것 같아 이것저것 뒤적여보았는데,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이 책을 보면 비평가에 관한 정의가 나오는데, 인용만으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비평가 자질이 있는 것 아닐까 싶다.

‘사유의 유격전을 위한 현대의 교본’이라 붙은 부제는 과장이다. 많은 사람들이 베냐민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축하고 있지만, 그러기에는 소품이다. 그렇지만 발랄하고 번뜩이는 기지를 발견하는 즐거움은 가득 안겨준다. 누군가 이미 자기 것처럼 써먹은 말이 베냐민의 것이라는 점도 확인하게 되고, 이 주제로 누군가 한 편의 논문을 써낼 만하겠다는 것도 여럿 있다. 소문난 잔칫집에 먹을 거 없다지만, 〈일방통행로〉는 길어갈 물이 여전히 솟아나오는 샘물 같다.

비평가의 자의식은 역시 읽기와 쓰기에서 발휘되는 듯싶다. 베냐민도 이 주제에 대한 단상을 자주 쏟아낸다. 도저히 비교대상이 될 법하지 않은 책과 매춘부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대목에서는 그의 재치가 돋보인다. 책과 매춘부는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책과 매춘부에는 자신들을 갈취하고 괴롭히는 남자들이 달라붙어 있다. 매춘부야 금세 떠오르지만 책은 누구일까? 비평가란다. 책과 매춘부는 많은 후손을 남긴다는 유사성이 있다.

글쓰기에 관한 잠언에도 귀담아들을 것이 수두룩하다. 더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코 글쓰기를 멈추지 말라든지, 단 한 줄이라도 글을 쓰지 않고 보내는 날이 없도록 할 것※하물며 몇 주일씩이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라든지, 저녁부터 꼬박 다음날이 밝아올 때까지 매달려 보지 않은 어떤 글도 결코 완벽하다고 간주하지 말라 같은 말은 글쓰기 입문자들이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한다.

베냐민의 치열한 비평정신을 알 수 있는 대목은 ‘비평가의 테크닉에 관한 13개의 테제’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
이권우 / 도서평론가
비평가는 문학투쟁의 전략가이다, 당파에 가담할 수 없는 자는 침묵해야 한다, 비평은 예술가의 언어로 말해야 한다, 비평은 도덕적 사안이다, 비평가에게는 동료들이 상급심이다 같은 말은 곱씹어볼수록 그 뜻이 새로워진다. “후세는 잊거나 칭송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비평가만 이 작가의 면전에서 판결을 내린다. 책을 없애버리려는 자만이 비평할 수 있다”는 말은 정신 번쩍 들게 하는 죽비소리다.

1983년에 나온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이 국내 베냐민 신도들에게 경전처럼 읽힌 책이다. 베냐민 사상을 총체적으로 읽어내기에는 너무 빈약한 목록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 그의 저서나 연구서가 꾸준히 나오고 있어 다행이다.


20세기에 나타난 21세기의 비평가라 할 만한 베냐민에게서 근대성의 정체를 찾아내는 일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이권우 / 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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