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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

등록 2007-12-07 21:13수정 2007-12-07 21:29

〈명랑한 밤길〉의 작가 공선옥.
〈명랑한 밤길〉의 작가 공선옥.
〈명랑한 밤길〉
공선옥 지음/창비 펴냄·9800원

공선옥(44)의 모성은 진화하는 모성이다. 첫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1994)에서 주로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어머니 되기의 힘겨움을 그렸던 그는 이후 세상 천지의 가엾고 불쌍한 목숨들에게로 시야를 넓혀 왔다. 그의 네 번째 소설집 <명랑한 밤길>은 그렇게 넓고 그윽해진 모성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

“애 가진 여자가 밥 먹는 모습은 짠하다. 새끼 밴 어미가 먹는 것을 저 뱃속의 또 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애 가진 여자들한테는 뭐든지, 누구든지 먹을 것을 퍼주어야 한다. 그것이 생명에 대한 도리다. 그러나 내게는 누구도 밥을 주지 않았다.”(205쪽)

팍팍한 현실 앞에 좌절된 ‘모성’은
아련한 꿈과 소망으로서흔적을 남기고

<79년의 아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 구절은 모성의 권리 선언이라 할 만하다. 어미는 세상을 향해 먹을 것을 요구할 당당한 권리가 있다. 그것은 어미가 생명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어미가 그런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는 새끼를 먹여야 한다는 의무에서 온다. 어미의 권리는 새끼에 대한 의무를 전제로 한 권리인 것이다. 그러나 <79년의 아이>의 주인공 어미는 제 새끼를 부양하지 못했다. 십대 미혼모로서 낳은 아이를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입양시켰던 경험은 권리로서의 모성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킨다. 그의 모성은 성립 불가능한 모성이다. 그렇지만 그가 어미 된 도리를 하지 못한 것이 먼저인지, 그에게 누구도 밥을 주지 않은 사태가 먼저인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노릇이다. 그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얽혀 있기 십상이다. 이렇듯 당위로서의 모성과 그것을 성립하기 어렵게 만드는 현실 사이의 괴리와 긴장 위에 공선옥의 소설은 구축된다.


좌절을 겪은 당위로서의 모성은 아련한 꿈과 소망으로서 흔적을 남긴다. 79년 이후 낳은 두 아이에게서 끊임없이 79년의 아이의 그림자를 보던 여자는 결국 “나도(…)아이를 입양하겠다는”(215쪽) 소망을 품는다. <폐경 전야>에서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지고 싶어하는 갱년기 여자는 상처입은 도둑고양이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좌절된 모성을 다독인다.

“태어나서 우는 놈이 사는 벱이여”
울음은 안쓰러운 존재들의 자기선언이다


〈명랑한 밤길〉
〈명랑한 밤길〉
프로이트는 좌절된 성욕이 꿈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고 보았지만, 공선옥의 소설들에서 꿈과 소망을 낳는 것은 좌절된 모성 또는 생명 충동이라 할 법하다. 그것을 다른 말로 사랑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독한 우정>에 나오는 구절을 빌려 말하자면 공선옥 소설의 주인공들은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의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235쪽)이다. 그러나 날이 흐려 달이 안 보이더라도 “달은 빗속에 숨어 있”(194쪽)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사랑과 소망은 아주 스러지지는 않는 것이다.

“밥 묵고 살라먼 울어야제. 울어야 밥맛 나고 밥 묵어야 심이 나제. 별것이나 있간디. 암것도 없어. 태나서 우는 놈이 사는 벱이여. 울어야 산 목심이여. 그저 내 울음이 내 목심줄이여.”(56쪽)

<영희는 언제 우는가>라는 작품에서 영희의 시고모가 하는 이 말은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의 사랑을 하기, 그러니까 빗속에서 달을 보기의 비밀을 알려준다. 울음은 바로 목숨의 표현이자 소망에 다가가는 수단이다. 그것은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의 유일하게 남은 안간힘이기도 하다. <아무도 모르는 가을>에서 수재로 남편을 잃은 인자가 가을 설악으로 가는 고속도로의 차량 행렬을 향해 속으로 외치는 ‘우리 여기 있어요오’(100쪽)에서 보듯 그 울음은 안쓰러운 존재들의 절박한 자기 선언이자 구조 요청이라 할 수도 있다. 공선옥 소설집 <명랑한 밤길>은 어미의 울음과 새끼의 울음이 서로를 부르며 공명하는 한바탕 울음판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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