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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200년전 그들의 운명도 사랑에 몸부림쳤다

등록 2007-12-28 21:18수정 2007-12-28 21:32

김진규씨
김진규씨
〈달을 먹다 〉
김진규 지음/문학동네·9800원

김진규(38·사진)씨의 장편 〈달을 먹다〉는 5천만 원 고료 문학동네소설상의 제13회 수상작이다. 1회 수상작이었던 은희경씨의 〈새의 선물〉에서부터 지난해 수상작인 김언수씨의 〈캐비닛〉에 이르기까지 문제작들의 산실 노릇을 한 이 상의 올해 수상자가 소설이라고는 단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완벽한 신인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한국외대 이란어과를 졸업한 작가는 졸업을 전후해 잠시 출판사에서 일했으나 이내 결혼하고 지금까지 전업주부로 지내 왔단다. ‘입력된 만큼 출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는 해도 처음 쓴 소설로 이렇게 큰 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스캔들이라 할 법하다.

수상작 〈달을 먹다〉 역시 일종의 스캔들을 소재로 삼았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정조와 순조 연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소설은 이종사촌 오누이인 희우와 난이의 금지된 사랑을 중심으로 짜여진다. 여기에다 난이의 이복 언니인 절름발이 향이를 향한 이웃집 청년 여문의 대책없는 짝사랑, 향이 어미 후인과 그보다 열댓 살 남짓 어린 총각 후평의 사랑의 도피행 등이 어우러지면서 200년 전 사람들의 사랑과 운명과 죽음의 드라마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신인작가 첫 작품으로 문학동네소설상 수상
조선시대 배경 이종사촌간 금지된 사랑 중심
화자 9명이 돌아가며 자신의 이야기 풀어내

소설은 모두 아홉 명의 화자가 많게는 열 번, 적게는 한 번씩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입체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열 번으로 가장 많은 발언 기회를 얻는 것은 희우의 어미인 묘연. 소설 앞부분에서 묘연은 아비 류호의 못 말릴 엽색행각을 고발하는 역할을 맡는다. 웬만한 여자들 뺨치게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그는 치마만 둘렀다 하면 미추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흘레’(류호의 부인이 쓴 표현)를 붙다가 결국 복상사라는 황홀하면서도 수치스러운 종말을 맞는다.



〈달을 먹다〉
〈달을 먹다〉
류호의 숱한 엽색행각 중에서도 묘연 어미의 몸종이자 동무 대신이었던 선이를 건드려 하연을 낳게 한 일은 이 소설 속에서 일종의 원죄의 자리를 차지한다. 양반 아비에 노비 어미 사이에서 태어난 하연은 향이를 데리고 혼자 사는 ‘최약국’에게 시집가며, 그 둘의 소생인 난이가 묘연의 아들 희우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정조로 짐작되는 개혁군주의 치세와 의문의 죽음, 그에 이어지는 외척들의 전횡과 홍경래의 난을 비롯한 사회적 혼란이 희미한 배경으로 깔리기는 하지만, 〈달을 먹다〉는 그런 커다란 역사보다는 개인들의 작은 역사에 더 주목한다. 작가는 중심 인물들만이 아니라 주변의 ‘단역’들에게도 한결같이 섬세한 시선을 던지는데, 주인공이든 보조적 인물이든 소설 속 개인들의 행동과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사랑 또는 정념이라 할 수 있다. 후인이 곁에 있을 때에는 차갑게만 대하다가 막상 후인이 떠나고 난 뒤에야 제 가슴에 아내의 이름을 새긴 최약국, 절름발이 향이를 향한 사랑을 위해 저 역시 절름발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여문은 대표적이다.

〈달을 먹다〉를 읽다 보니 박경리씨의 〈토지〉와 최명희의 〈혼불〉 같은 앞선 역사소설들이 떠올랐다. 선배 작가 박완서씨는 심사평에서 “작가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그 작의(作意)가 와 닿지 않았다”고 썼는데, 거의 무목적적이라 할 이야기의 충동에 지배된다는 점에서는 같은 상의 제10회 수상작인 천명관씨의 〈고래〉와도 닮았다는 느낌이다. 이 신인 작가의 다음 소설이 궁금해진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문학동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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