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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중국 근현대 격랑 헤쳐나간 학자의 양심

등록 2008-02-22 20:54

강의 중인 천인커(맨 오른쪽). 사계절 제공.
강의 중인 천인커(맨 오른쪽). 사계절 제공.
〈진인각, 최후의 20년〉
육건동 지음, 김형종·박한제 옮김/사계절·3만9000원

공산당 반대했으나 중국 떠나지 않고
‘우파 우두머리’ 핍박에도 뜻 안굽혀
800쪽 분량 5년간 걸쳐 꼼꼼한 번역

홍군의 베이징 포위 공격이 턱밑에까지 들이닥쳤던 1948년 12월15일, 소형 비행기 한 대가 베이징 남쪽의 난위안 비행장에 내렸다. 적지에 놓이게 된 베이징의 일류 학자들을 ‘안전한’ 국민당 지역으로 이송하려는 것이었다. 이 비행기에는 베이징대학 교장 후스와 함께 칭화대학의 저명한 역사학 교수 천인커(진인각·1890~1969·사진)가 올랐다.

그러나 같은 비행기에 탄 두 학자의 운명은 갈렸다. 후스는 1949년 국민당의 최종적 패배와 함께 대만으로 향했지만, 천인커는 공산당의 정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본토를 떠나지 않았다. 대신 교장 천쉬징(진서경)의 초청에 따라 광저우의 링난(영남)대학으로 향했다.

그는 왜 본토를 떠나지 않았을까? 그가 어느 곳에서든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학자로서의 ‘자유사상과 독립정신’을 지키려 했기 때문이었다고 〈진인각, 최후의 20년〉 지은이 루젠둥(육건동)은 해석한다. 천인커의 지인이자 저명한 학자들이었던 장바이링(장백령)이나 우미(오복)도 비슷한 이유로 본토를 떠나지 않았다.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묻는다. “(사회주의) 중국 사회에 이런 유형의 순수 학자들이 필요한가? 또 그들의 존재를 과연 허용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학자로서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려 했던 천인커의 뜻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실현되기 어려웠다. 1953년 중국 역사연구위원회는 그를 중고사연구소장으로 지명했다. 그는 이를 맡는 조건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것을 허용한다는 마오쩌둥과 류사오치의 증명서를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정치적 직책을 맡지 않겠다는 뜻을 지켰지만, 공산당이 이를 달가워할 리 없었다.


1957년 이른바 ‘반우파투쟁’에서 “부르주아 전문가 쪽의 대표로서 우파의 우두머리”라는 비판을 받으며, 그의 말년 고초는 시작됐다.


〈진인각, 최후의 20년〉
〈진인각, 최후의 20년〉
그는 1945년 시력을, 1962년 오른쪽 다리를 잃었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웠던 일은 1965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에서 수많은 친구들을 잃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를 링난대학에 초청해 대만으로 가지 않도록 했던 천쉬징은 문화대혁명 때 ‘미국과 국민당의 스파이’로 몰리다가 급사했다. 그와의 관계를 추궁당하자 천인커는 “단지 총장과 교수의 관계일 뿐이며, 밀접한 왕래는 없었다”고 완곡하게 부인했다. 문화대혁명은 지식인들을 증오했고, 이렇게 모욕했다.

살던 집에서 쫓겨난 그는 1969년 10월7일 장 경색으로 79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전 스스로 ‘반동적 학문의 권위자’임을 인정했다고 전해진다. 지은이는 이것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공산당과 선을 긋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학자로서 천인커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관룽집단설’을 주창한 것이다. 수·당의 주도 세력이 순수 한족이 아니라, 관룽(산시성와 간쑤성) 지역에 자리잡은 한족과 호족(오랑캐)의 융합 세력이라는 이론이다. 관룽집단이 포용적 태도로 서로 다른 종족과 문화를 아우름으로써 수·당을 건설하고 세계제국으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천인커가 살았던 시대는 그런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 이 책은 중국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 학자로서의 양심을 지키려 했던 한 지식인이 당한 고통에 관한 이야기다.

800쪽이 넘는 이 책을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김형종 교수는 5년에 걸쳐 매끄러운 문장으로 옮겼고, 꼼꼼한 주석과 용어 설명도 붙였다. 다만 현대 중국의 인명과 지명을 한국식 한자음으로 옮김으로써 독자들에게 혼란과 불편을 주는 점이 아쉽다.

김규원 기자 ch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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