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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 백주년, 이 나라 시에 영광 있으라

등록 2008-02-29 19:48수정 2011-12-13 16:46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
올해는 신시 백주년. 시인 아니어도 느낌이 없을 수 없소. 시적 언어가 얼굴만 내밀어도 다른 모든 언어들이 가짜로 판명된다고 믿는 사람에겐 특히 그러하오. 이 나라의 경우 그 신시 백주년의 개막 장면을 엿보는 일이 유독 즐거운 것은 웬 까닭일까. 일목요연한 해답이 주어지오. 보시라. 거인 육당은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외쳐마지 않았소. 내 이름은 바다. 내 실력을 잠시 보라. 철썩 철썩 척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무엇을? 뭐든지. 태산도, 집채만한 바위도 여지없다. 어찌 그뿐이랴. 진시황도 나팔륜(나폴레옹)도 마찬가지. 잘난 척하는 연놈들 모조리 나와보라. 나와 겨룰 만한 것은 저 푸른 하늘뿐. 이 하늘과 바다 사이에 있는 인간이란 종자는 얼마나 유치하고 시시하고 좀스럽고 못생겼는가. 그렇기는 하나, 그중에는 제법 괜찮은 종자가 딱 하나 있도다. 대체 그 종자는 뉘인고. 소년이로다. 소년이되 담 크고 순정한 소년이로다. 오너라, 귀여운 종자여 입맞춰 주마(〈해에게서 소년에게〉, 1908. 11), 라고.

육당은 대체 어쩌자고 소년을 바닷가에 내세웠을까. 소년이란 무엇이뇨. 속이 텅 빈 백지 상태의 인간 종자가 아니었던가. 바다란 무엇인가. 인류사의 나아갈 길 그것이 아니었던가. 이 거대한 문명사의 이념이 근대라면 이를 가장 순수히 또 정결히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종자는 마음 가난한 소년일 뿐. 2천년 전 나사렛 청년도 같은 말을 했것다. 마음 가난한 자, 복되도다, 라고. 이 나라 근대시란 범박히 말해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을까. “큰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넓은 것을 보고자 하는 자, 기운찬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끈기있는 것을 보고자 하는 자, 그리고 태서미(泰西美), 태동미(泰東美), 예수미, 불교미 등을 보고자 하는 자”(〈소년〉 2권 8호)를 두고 시인이라 했던 것이니까.

이 사명감을 과연 이 나라 시인들은 수행했을까. 많은 시인들이 예언자로 빈 들판에서 울부짖었고, 혹은 옥중에서 손톱으로 썼고, 또는 불러도 대답 없는 임 앞에 침묵했으니까. 어찌 이뿐이랴. 계절의 여왕 5월을 노래했고, 엄마와 누나도 읊었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히는 유리창도, 공포의 기록으로 오감도도 그렸으니까. 아무리 인색한 자라도 이 장면 앞에서라면 “이 나라 시인이여, 영광 있으라”라고 축사를 보낼 만한 일. 바로 그 때문에 다음의 백주기를 위한 고언도 불사할 수밖에. 그것은 새로운 도표 세우는 일. 소년을 바닷가에 세웠음이 지난 백년의 말뚝이었다면, 다가올 백년의 도표는 어떠해야 할까. 대체 누구를 어디에다 세워야 할까.

이 물음을 피해갈 수 없는 장면에 왔다고 느낀 사람이라면 그는 얼마나 육당이 부러웠으랴. 어째서? 오늘의 바다는 크지도 잘나지도 않으니까. 오염된 바다이자 호수급으로 졸아들어 악취조차 풍기니까. 어찌 소년을 거기 세울 수 있으랴. 대체 이 담 크고 순정한 소년을 세울 곳은 어디일까. 혹시 시인 배한봉이 지키고 있는 우포늪일까(생물학적 상상력), 저 비틀스가 가로지르라고 감미롭게 노래한 우주의 하늘가일까(우주적 상상력). 어느 쪽이든 또 어디이든 분명한 것은 다음 한 가지. 여전히 주인공은 소년이어야 한다는 것. 소년이기에 담이 클 수밖에. 소년이기에 순정할 수밖에. 그만이 서정시의 담당자이니까. 이 어찌 가슴 벅찬 사업이 아니랴. 그러기에 지난 백년의 이 나라 시에 영광 있어라. 더욱 영광 있어라, 새로이 또 다가올 백주기에.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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