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의 문학산책
김윤식의 문학산책 /
불세출의 사관 사마천에 아득히 미치지 못하는 사내라는 필명을 가진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1923~1996)의 한국기행문집 <옛 조선남부 기행>(韓のくに紀行) 속엔 이런 대목이 있소.
“한국의 처지에서 말하면 황제란 우주에 단 한 사람뿐. 중국의 황제. 한국은 이왕가라 하듯 한 계급 밑의 왕. (…) 그 때문에 서울에 남겨진 이왕가의 궁전에 가서도 모양으로 보아 같은 상상의 동물인 봉황은 있어도 용은 없다.”
씨는 금방 이렇게 덧붙였소. “일부러 필자가 한국여행 중 서울의 옛 궁전을 배관했을 때 역시 봉황은 있어도 용의 모양은 없었다”라고. 앞 대목은 씨의 동양사에 대한 안목에서 나온 것이며 뒤엣 대목은 사료의 바탕 위에서 글쓰기에 임한 씨 나름의 성실성의 발로였을 터. 이런 대목에 접한 한국 독자층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법하지 않을까. 조금은 모자라지만 크게 틀린 것은 아니라는 반응이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씨가 좋아하는 퉁구스인스런 반응. 후자는 이렇게 대들 법하지요. “시바씨, 당신이 역사소설은 잘 쓰는지 모르나 조급하고 게다가 성실치 못하다”라고. “그대는 경복궁 근정전에도, 덕수궁 중화전에도 가보지 않았으니까. 거기 옥좌 위를 보시라.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이 덩그렇게 조각되어 있다”라고.
두루 아는바 조선의 정궁은 넷. 제일 오랜 것이 창경궁 명정전. 그 다음이 창덕궁 인정전. 이들 옥좌 위엔 쌍룡 대신 목각으로 조각된 새 두 마리가 매달려 있소. 이 새를 두고 씨는 봉황이라 했것다. 씨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조선조가 대한제국(1897)으로 변신하는 과정 속에 놓인 근정전과 명화전의 옥좌 위의 쌍룡도 볼 수 있었을 터. 이런 비판 앞에 씨는 어떤 몸짓을 보일까. 약간 이마를 찌푸리긴 해도 마음은 평화롭지 않았을까. 어째서? 씨의 안중에는 옛 고급문화의 나라 조선을 염두에 둔 기행이었기에 용 대신 봉황만 보였을 터. 이 기행문에서 제일 통쾌한 대목이라 하여 씨가 내세운 다음 장면이 그 증거. 경주 송림 여인들 춤마당에 카메라를 들이댄 일본 청년을 향해 30대 조선 신사가 성내어 호통치는 장면. 어째서 이 장면이 그토록 씨에게 통쾌무류였을까.
“성난 퉁구스인!”이 그 정답. 겉 다르고 속 다른, 혹은 신중하기 짝이 없는 종족들과는 엄청 다른 이것. 추측건대 한국기행이 풍물 감상도 예술 음미도 아닌 “일본의 선조 나라에 가기”였던 것이니까. 씨에게 퉁구스인의 한 사람으로 경의를 표하는 길은 없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씨가 명정전이나 인정전에서 보았던 그 봉황에 대해 말을 조금 걸어보아도 되지 않을까. 그 새가 과연 봉황일까, 아니면 또다른 이름의 새일까. 일찍이 이 나라 문학판엔 이 문제가 제기된 바 있소.
“큰 나라 섬기던 거미줄 친 옥좌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의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조지훈, <봉황수> 부분) 이 시를 두고 시비를 건 것은 평론가 이원조. 왈, “아마 덕수궁 내의 중화전에 새겨 있는 악작(악작)을 봉황으로 잘못 알았을 것”이라고. 이는 이원조의 작은 실수. 그렇다면 악작은 어떠할까. 위당 문하이자 국혼(國婚)까지 한 이원조의 지적이고 보면 봉황의 일종이긴 해도 악작이 좀더 전문적 견해였을까. 시바 씨가 살아 있었던들 이 과제에 동참해 봄 직하지 않았을까.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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