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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꿈틀대는 몸의 비명 ‘시인의 절창’

등록 2008-04-04 23:05

〈배꼽〉
〈배꼽〉
〈배꼽〉
문인수 지음/창비·6000원

세상 모든 약소자들 움직임
‘몸의 말’로 길어올린 절망
현실 직시 뒤 가까스로 ‘덕담’

문인수(63)씨의 새 시집 <배꼽>을 두고 선배 시인 황동규씨는 “꿈틀댄다”고 했다. 꿈틀댄다는 것은 무엇일까. 약동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지도 아닌, 힘겹게 살아 있음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겠는가. 문인수씨의 시집 속에서 꿈틀대는 것들은 노인과 장애인, 노숙자, 아프리카의 굶주린 어린이 …, 한마디로 세상의 모든 약소자들이다.

“왼발 발가락이/ 몽땅 몽그라졌구나, 끝없이 뒤뚱거린다. 뒤뚱뒤뚱, 몽땅하게 자꾸 깔아뭉개는 상처.”(<비둘기> 부분)

“외곽지 야산 버려진 집에/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배꼽> 부분)

시집의 맨 앞에 배치된 두 시 <꼭지>와 <만금이 절창이다>는 생의 말년에 이른 노인들의 꿈틀대는 움직임을 근거리에서 포착한다. <꼭지>에서 비탈진 골목을 올라 동사무소에 가는 독거노인 할머니의 형상은 흡사 달팽이와도 같다. “여생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올라간다.” 그 할머니가 골목길 전봇대 아래에서 쉬다가 자기를 닮은 노란 민들레꽃 한 송이를 발견하는 장면은 어여쁘다.

<만금이 절창이다>는 개펄에서 조개 캐는 일을 마치고 무척추동물처럼 배밀이 해서 돌아 나온 할머니를 주목한다. 그 할머니, 트럭 옆 땅바닥에다 조갯짐 망태를 내동댕이치듯 던지며 한마디 한다: “죽는 거시 낫겄어야, 참말로.” 고된 노동을 겨냥한 할머니의 한탄과 푸념을 시인은 그러나 ‘절창’으로 새겨듣는다: “참말로/ 늙은 연명이 뱉은 절창이구나, 질펀하게 번지는 만금이다.”

<꼭지>의 민들레꽃과 <만금이 절창이다>의 ‘절창’을 고난 속의 위안이나 절망 뒤의 희망쯤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시인은 빈말 같은 위안과 긍정으로 현실을 호도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대파 좌판을 펼치고 바닥에 주저앉은 노점 아주머니를 노래한 <파냄새>에서 시인이 “저 바닥은 사실/ 혹한이 돌보는 셈이다. 얼거나 썩지 않겠다.”고 쓸 때, 그것은 쓰라린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한 뒤에야 힘겹게 건네는 안간힘의 덕담이라 할 수 있다. 수조 바닥에 붙은 도다리들을 묘사한 다음 시인은 묻지 않겠는가: “당신의 비애라면 그러나/ 바닥을 치면서 당장, 솟구칠 수 있겠느냐, 있겠느냐.”(<도다리>)

솟구치는 것보다는 가라앉는 쪽이 더 손쉬울지도 모른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ㆍ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씨”의 죽음을 다룬 시를 보라. 조문을 온 같은 처지의 동료들에게 정식씨는 죽음으로써 비로소 장애라는 감옥에서 벗어난 양 차라리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 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이것이 날개다> 부분)

정식씨와 동료들을 보는 비장애인 자원봉사자는 급기야 왈칵, 울음보를 터뜨리는 것인데, 시인은 장애와 비장애가 어우러진 그 모습을 그저 담담하게 관찰하고 묘사할 따름이다. 그러나 그라고 왜 울 줄을 모르겠는가. “나도 울면 우는 소리가 난다”(<바다 이홉>)고 그는 쓰고 있거니와, 시집 <배꼽>의 시들은 바로 그가 운 울음이 아니겠는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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