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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자본가의 역사’에 가려진 ‘민중의 역사’

등록 2008-05-02 20:34

〈히드라〉
〈히드라〉
17~19세기 제국적 욕망에 맞선
노예·평민들 패배와 반란의 기록
문학·사료 통한 꼼꼼한 재구성
〈히드라〉
피터 라인보우·마커스 레디커 지음.정남영·손지태 옮김/갈무리·3만원

사람의 역사에서 바닷길의 발견은 우주론에서 ‘특이점’의 위치와 같다. 빅뱅 이론에서 우주의 시초를 설명하는 준거로 정립된 특이점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무한히 넓힌 것과 마찬가지로, 바닷길은 노동의 경험을 변형했으며 상품생산의 확대를 폭발적으로 가져왔다. 바닷바람이 증기기관과 더불어 자본주의를 추진한 쌍발 엔진이었던 것이다. 17세기 이후 유럽과 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 저질러진 불평등과 폭력, 억압과 수탈은 그 질서의 배설물이었다. 하지만 기록된 ‘공식 역사’에서 자본가들의 악행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역사책을 ‘쓴’ 것은 자본가 또는 그들과 한통속인 이들이었지만 역사책을 ‘만든’ 것은 그들에게 육체와 정신을 착취당한 노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특이점’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두고 우리는 대부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자본가의 눈이고 우리는 대개 자본가가 아니다. 어찌해야 하나.

“우리의 책은 밑에서부터 본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근대적 세계경제의 발생에 필수적이었던, 다민족 계층의 잊혀진 역사의 일부를 복원하려고 시도하였다.” 17세기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자본주의의 특이점을 탐구하면서 <히드라>의 지은이들이 내세운 관점이다. ‘공식적인 역사책’을 전복하겠다는 선언이다. ‘제국과 다중의 역사적 기원’을 다뤘으므로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펴낸 <제국>과 <다중>이 마땅히 연상된다. 하지만 네그리·하트가 규정한 제국·다중의 개념과 지은이들의 그것은, 말장난 같지만, 같으면서 다르다. 네그리·하트가 제국을 지배와 자본, 생산과 교환의 네트워크로 파악하면서 국민국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개별성을 넘어 하나의 질서로 나아가는 형태를 말했다면, 지은이들이 서술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들어온 ‘제국주의’의 제국이다. 또한 지은이들은 흑인과 백인, 노동자와 부랑자 등 마르크스·엥겔스가 “잡색 군중”이라 일렀던, 수탈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다중이라고 규정하는 데 견줘 네그리·하트는 민중·대중·군중과 달리 하나의 통일된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와 다름을 다중의 핵심 개념으로 삼았다. 동시에 <히드라>와 <제국>·<다중>은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간결한 표현을 역사가 제임스 하월에게서 가져올 수 있다. “모든 땅이 우리의 나라일 수 있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이 세상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자유·평등·개방에다 공동으로 일하고 공동으로 살며 만인에 의한 만인의 지배를 이뤄내기, 이 모든 것들을 현실로 구현하는 주체가 다중이거니와 <히드라>는 다중의 ‘선조’들이 겪었던 쓰린 패배의 기록이다.


히드라는 17세기 무렵 자본주의의 시초에 기득권 계층이 다중을 억압과 수탈의 대상으로 규정하려 신화에서 끌어온 개념이다.  갈무리 제공
히드라는 17세기 무렵 자본주의의 시초에 기득권 계층이 다중을 억압과 수탈의 대상으로 규정하려 신화에서 끌어온 개념이다. 갈무리 제공
다중의 선조들의 대각에 헤라클레스가 있다. 그리스·로마인들에게 국가의 통합과 제국적 야망을 상징했던 신화의 영웅은 17세기에 이르러 자본주의 경제 성장의 상징으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이들에 맞서 싸운 선원·노예·평민들을 기득권은 히드라로 치부하며 척결과 박멸의 대상으로 몰아붙인다. 대서양을 둘러싸고 있는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를 하나의 거대한 시장으로 엮어 자본의 무한증식과 영구지배를 꾀하는 세력에게 ‘장작 패고 물 긷는’ 그들은 무질서를 생산하고 체제를 위협하는 ‘돼지 같은 다중’이며 머리 하나를 베어내면 그 자리에서 둘이 자라는 히드라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중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우승열패의 차꼬를 푸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비참은 사람으로 하여금 낯선 동료들과 사귀게” 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첫 식민지인 버지니아로 가는 시벤처호가 난파해 도착한 버뮤다에서 선원들은 낙원을 발견하고 투자자들의 통제와 지배에 저항했다. 에티오피아 출신의 ‘검둥이 하녀’인 프랜시스는 히드라의 세 머리, 곧 여성·서인도인·재침례주의자라는 존재 조건을 통해 마녀·비유럽인·이단이 배제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은유한다. 또한 미국 독립혁명의 주역이 잡색 군대였음에도 이들이 결국 역사의 수렁에 빠져 익사하고 마는 현실, 천박한 상인자본주의의 맹렬한 이윤 추구가 서아프리카 일대에 해적을 양산했지만 정작 그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요체를 구현했다는 것을 지은이들은 기록과 문학 작품을 방대하게 인용하며 촘촘하게 재구성해 보인다. 그리고 비록 200여년 전에는 패배했지만 다중의 힘은 “밤의 숲속에서 밝게 불타는 호랑이”처럼 살아 있다고 낙관하며 갈무리한다.

네그리·하트는 다중의 특성을 선명히 가리키는 것으로 인터넷을 들었다. 초기 다중이 걸었던 장정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폭도를 지칭했던 떼(swarm), 떼법 등에 덧칠된 부정적 의미를 걷어내고 떼지성을 구현하는 길은 소통하고 협력하며 새로운 삶의 형식을 끊임없이 상상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히드라>는 희망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각성된 개인이 튼실한 노드(접속점)로 우뚝 서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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