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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19세기 펑키한 ‘춘향전’, 한마디로 재미나요”

등록 2008-06-06 21:47

‘남원고사’ 현대어로 낸 이윤석·최기숙 교수
‘남원고사’ 현대어로 낸 이윤석·최기숙 교수
8년간 주석·2년간 번역 이해 쉽게 풀어
당대문화 담긴 생생한 박물학적 텍스트
힘겨운 삶 위안주는 속물성·유머 ‘매력’
인터뷰 / ‘남원고사’ 현대어로 낸 이윤석·최기숙 교수

“네가 이 밥을 아느냐?” “아옵니다.”(…)“어허! 미욱한 놈. 밥이면 다 밥이냐? 밥을 짓되 질지도 되지도 아니하고 고슬고슬하지만 속에는 뼈가 없고, 축축해도 겉물이 돌지 아니 해야 잘 지은 밥이라고 말할 수 있지. 이 밥은 곧 모래 밥이로구나.”

춘향이 보고 싶어 입맛마저 잃은 이몽룡이 괜히 방자의 밥 짓는 솜씨를 탓하는 대목이다. ‘니들이 ~를 알아?’라는 요즘 유행어와 흡사하거니와 그대로 전기 밥솥 광고에 나와도 잘 어울릴 법한 대사가 친근하다.

19세기 조선의 책 대여점인 세책점(貰冊店)에서 ‘잘나가던’ 한글 필사본 소설 <남원고사>가 현대어로 다시 태어났다. 이윤석(사진 왼쪽)·최기숙(오른쪽) 연세대 국문과 교수(고소설 전공)가 함께 쓴 <남원고사-19세기 베스트셀러, 서울의 춘향전>(서해문집·1만2900원)은 학자들도 해독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한 원전의 담장을 활짝 허물었다. <남원고사>는 손으로 베껴 전해져 내용이 조금씩 다른 <춘향전>의 여러 이본(異本) 가운데 하나로, 19세기 오늘날 종로구 와룡동과 묘동에 걸쳐 있던 세책점에서 유통됐다. ‘19세기 베스트셀러, 서울의 춘향전’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는 당시 세책점이 서울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학부 시절 강의를 들으며 <남원고사>를 ‘발견’했다. “굉장히 ‘펑키’하다고 느꼈어요. 가볍고, 경쾌하고, 유머러스하고, 젊고, 감각적이고…. 19세기 사람들의 놀이문화, 패션, 연애의 밀고 당기기 등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 살아 있는 박물학적 텍스트라고 생각했어요.”


〈남원고사〉
〈남원고사〉
새로운 게 없는 <춘향전> 대신 ‘펑키’한 <남원고사>를 일반 독자와 공유하는 길은 험난했다. 우선 띄어쓰기도 안 한 한글 필사본 속에 숨어 있는 각종 한시, 고사 등을 찾아내 주석을 달아야 했다. 100여년 전에 쓰였던 옛 국어를 현대 국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이어졌다. 독자들이 소설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하려면 19세기 조선시대 서울의 풍속과 문화사도 설명해야 했다.

10년 전부터 19세기의 세책을 연구하며 고소설 주석 작업에 몰두해 온 이 교수가 8년에 걸쳐 주석을 달았다. 최 교수는 지난 2년 반 동안 번역 작업을 하며 “일반 독자가 읽을 때는 고된 학문적 노동과 시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한마디로 재미있는” 현대판 <남원고사>를 만들고 해설을 보탰다.

최 교수가 꼽는 <남원고사>의 매력은 “힘겨운 삶도 껴안을 수 있게 하는 속물성과 유머”다. <남원고사>에는 “요 방정맞고 요망스런 아이 녀석아”(춘향이 방자에게)같이 낮은 수위부터 “발길 년의 볏다리를 둘러메고 나온 녀석 같으니”(월매가 방자에게) 같은 걸쭉한 욕설이나 육담이 31번이나 나온다.

<남원고사>는 당시의 속담, 욕설, 유행어, 유명한 사건 등 문화사적인 정보를 현장감 있게 넣어 현실과 소통 가능하게끔 고안된 텍스트였다. “<남원고사>는 조선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낸 소설 가운데 기법과 내용 면에서 최고의 단계까지 갔다고 생각합니다. 고소설의 95% 이상이 중국을 배경으로 유명한 장군들의 싸움 등을 소재로 삼았지만, <남원고사>에는 당대 조선 사람들의 일상이 나옵니다.”(이윤석)

<남원고사>는 이미 있는 텍스트를 인용하고 편집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혼성모방’에도 능했다. 춘향이 이몽룡과 이별한 뒤 슬퍼하는 대목에는 정철의 <사미인곡> 전문이 삽입되고, 남원의 왈짜들이 모여 질펀하게 노는 대목에는 <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 등 당시의 베스트셀러가 과감하게 직접 인용된다. 당대에 유행한 시조·잡가·민요·한시·가사·소설 등의 일부나 전문이 수시로 출몰한다.

“요즘 드라마로 치면 극중에서 주인공이 최신 유행곡을 부르는 장면을 연출하는 거죠. 시청자들이 참 좋아하잖아요?”(최기숙) 유행에 민감한 독자들을 만족시키면서 유행을 모르고 소외됐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문화담론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혼성모방’ 기법은 고사를 많이 인용할수록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당시의 창작 행태와도 부합했고, 상업적으로 책을 유통하는 세책점에서 권수를 늘려 이윤을 남기기에도 좋은 방편이었다.

<남원고사>가 질긴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데는 완성도 높은 캐릭터도 한몫했다. 최 교수는 특히 춘향의 캐릭터에 주목한다.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인물이에요. 모두가 자신을 기생이라고 부를 때 ‘나는 기생이 아니고 한 여자이고 싶다’며 실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했어요. 페미니즘 관점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지요.”

글 김일주 기자 pearl@hani.co.kr

사진 김명진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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