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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감당하기 어렵다면, 이야기를 들어봐요

등록 2008-06-13 20:49

소설가 김형경씨
소설가 김형경씨
심리에세이 2편 뒤잇는 ‘치유’의 소설
17살 소녀 고통 보듬는 ‘이야기의 힘’
성장소설 성격에 문학 본질도 건드려
〈꽃피는 고래〉
김형경 지음/창비·9800원

김형경씨의 소설 <꽃피는 고래>는 ‘고아에서 어른으로’ 되어 가는 열일곱 살 소녀 니은이의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와 아빠가 교통사고로 숨지는 바람에 천애고아가 된 니은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상실감을 딛고 꿋꿋하게 다시 서기까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동안 <사람풍경> <천 개의 공감> 같은 산문집을 통해 인간 심리에 많은 관심을 쏟아 온 작가가 본업인 소설로써 상처와 치유라는 주제를 다룬 것이다.

니은이가 상처와 대면하고 끝내 그것을 극복하는 무대는 아버지의 고향인 처용포다. 울산 장생포를 모델로 삼았을 처용포는 한때 고래잡이의 거점이었지만, 포경이 금지된 뒤 지금은 인근 공단이 초래한 환경 파괴에 신음하고 있는 낙후 지역이다.

그렇지만 이곳은 또한 풍요로운 ‘신화’의 고장이기도 하다. 생전의 아빠와 엄마는 자신들을 서역 상인 처용과 인도 공주 허황옥의 후예라 믿으며 서로를 ‘처용’과 ‘황옥’으로 불러 버릇했다. 엄마 아빠가 즐겨 들었던 노래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는 고래잡이의 고장 처용포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신화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곳에만 오면 지어낸 이야기와 진짜 이야기가 구분되지 않았다.”(8쪽)


〈꽃피는 고래〉
〈꽃피는 고래〉
처용포는 이야기의 고장이다. 니은이는 상실의 아픔을 다스리고자 내려온 처용포에서 무엇보다 숱한 이야기와 마주친다. 유능한 고래잡이 출신인 장포수 할아버지는 지금은 공해 지표 식물인 미국자리공이 점령한 뒷산을 사철나무숲으로 가꾸고 있다. 젊어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를 잇따라 잃은 왕고래집 할머니는 뒤늦게 한글학교에 다니며 가갸거겨를 배우고 있다. “앞으로는 어떤 생명도 내 손에서 떠나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한 할머니는 주인 잃은 고양이들을 거두는 마음으로 방황하는 니은이를 챙겨 먹인다.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런 이야기들에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89쪽)


“누가 내게 이야기를 좀더 들려줬으면 싶었다.”(212쪽)

이야기의 고장에 온 니은이가 실제로 있었거나 아니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들으며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야기에 치유의 힘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이러할 때 이야기는 심리상담사의 조언일 수도 있고, 아예 문학 자체일 수도 있으리라. 그런 점에서 <꽃피는 고래>는 깔끔한 성장소설이자 문학의 본질과 역할을 다룬 일종의 메타소설로 읽힐 소지도 지니게 된다.

“(…) 할아버지 이야기는 조금씩 살이 붙고 색이 덧칠해질 것이다. 처용암에 고래배를 닮은 바위나 할아버지를 닮은 나무 한 그루 서 있으면 이야기는 더욱 완벽해질 것이다.”(268쪽)

고래잡이를 하던 시절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박물관에 기증한 장포수 할아버지는 오래도록 발이 묶였던 고래잡이 배를 띄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사라진 할아버지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이고, 죽은 엄마 아빠 역시 할아버지와 함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 니은이는 믿는다. 그러니까 소설 <꽃피는 고래>는 사라진 할아버지가 약속하는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으로 막을 내린다.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기대와 함께 ‘고아에서 어른으로’ 바뀌는 니은이의 허물벗기는 완성되는 것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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