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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형의 기준선은 어딘가’ 묻는 일본 소설

등록 2009-03-12 18:14수정 2009-03-12 19:08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 사형이라는 건 애초에 확실한 것이 될 수가 없어. 여기까지는 사형이고 여기서부터는 사형이 아니다, 라는 기준선이 애매해서 때와 경우에 따라 달라져버린다고. 억지로 어딘가에 선을 그어봤자 그 선이 절대로 옳은 것이 될 수는 없어. (…) 사형이라는 건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일본 작가 나카무라 후미노리의 소설 <모든 게 다 우울한 밤에>(양윤옥 옮김)의 한 대목이다. 주인공인 교도소 직원 ‘나’에게 상관인 주임이 하는 말이다. 이들이 근무하는 교도소에 신혼부부를 살해한 열여덟 살 야마이가 입소하고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 교도관들은 새삼 사형제의 취지와 한계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사실 이런 발언을 하는 주임은 이미 두 번이나 사형 집행에 가담한 적이 있는 인물이다.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는 사형수를 온몸으로 찍어누르며, “내가 유도를 한 건 동아리 친구들하고 전국대회에 나가기 위해서였지 이런 짓을 하자고 그토록 열심히 연습한 게 아니었”다고 회의하던 주임은 집행이 끝난 뒤 “이미 나는 그 이전의 나와는 다르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1998년 이후 사형 집행이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한 흉악범의 검거를 계기로 사형 집행 재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불거져나오고 있다. 일부 언론 역시 분노한 여론을 등에 업고 사형 집행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나카무라의 소설에서도 매스컴의 반응은 사형 선고와 집행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야마이의 범죄에 희생된 이들의 부모가 눈물을 흘리며 인터뷰에 응하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매스컴은 일제히 사형을 호소했다.”

“내가 할 일이 딱 한 가지 남았어. 죽는 일. (…) 그 두 사람의 아버지나 어머니, 친척들은 내가 살아 있으면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그게, 그게 내 역할이야. 처음이야. 내가 뭔가 할 일이 있다는 거. 그래서 죽을 거야.”

태어난 직후 부모에게 버림받고 양부모에게도 학대 당하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아온 야마이는 스스로를 ‘악’이자 ‘쓰레기’로 간주한다. 그는 1심의 사형 선고에 대한 항소를 포기한 데 이어 옥방에서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른다. 야마이와 마찬가지로 고아 출신이지만 보육원에서 훌륭한 원장을 만난 덕에 온전한 삶을 살게 된 ‘나’에게 야마이의 처지는 남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자살하려던 자신에게 ‘생명은 수십억 년의 끈을 이어 온 기적’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던 원장처럼 ‘나’는 야마이에게 목숨의 소중함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려 한다.


“그래도 너는 세상에 태어났잖아? (…) 그렇다면 너는, 좀더 여러 가지 것을 알아야 해. (…) 얼마나 훌륭한 것들이 있는지,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지금 여기에 있는지. 너는 그걸 다 알아야 해. 목숨은 사용해야 하는 거란 말이야.”

야마이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고 바흐의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어>를 듣는다고 사형 판결이 취소되거나 희생된 이들이 되살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목숨이 소중하고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닫는 계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떤 인간이든 예술을 접할 권리는 있다”고 주임은 야마이에게 말한다. 그렇다. 예술은 그 무엇에 앞서 생명의 편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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