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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세헤라자데에 바치고 싶은 작품
- 이승우의 근작에 부쳐

등록 2012-04-29 22:04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데뷔 31년, 쉬지 않고 소설길에 전념한 이승우씨의 근작 <그녀는 그가 한 달 열흘 만에 나타났다고 말했다>(<한국문학> 봄호)는 세 번쯤 읽어야 적당하오. 카프카의 작품은 두 번 읽어야 된다(카뮈)고 했다는데, 우리의 이승우는 하나가 더 많다고 볼 것이오.

첫 번째 독법은 제목 음미에서 오오. 니체가 버티고 있고, 이를 뛰어넘고자 한 호동(湖東)의 수도승 박상륭의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2003)는 뱀과 독수리를 양손에 쥐고 있으니까. 호머도 손오공도 없이 가진 것이라곤 달랑 맨손뿐인 이씨는, 또 우리들 독자는 얼마나 난감한가. 아니 홀가분한가. “신이 죽었다”, “다시 살려내야 된다” 등에서 무심하게 벗어나 소설만 쓰면 되니까. 되다니? 신의 무게에 준하는 바위나 쇳덩이 없이도 소설이 씌어질 수 있을까. 있다고 작가 이씨가 내세웠소. 왜냐면 우리에겐 ‘그/그녀’가 있으니까.

두 번째 독법은 소설의 등뼈에 관한 것. 이것 없이는 어떤 소설도 이루어질 수 없소. 그런데 참으로 딱하게도 이 등뼈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찬양할 만한 것이 줄어들게 마련. 어째서? 시작, 중간, 끝이 제멋대로인 촌충 같기 때문. <인도로 가는 길>(포스터)의 작가는 이것이야말로 저 원시시대 인간이 동굴에 모여 밤을 새운 이유라고 우긴 바 있소. 모닥불 앞에 모인 원시인들은 매머드와 들소와의 싸움에 지쳤기 때문에 마음을 졸이게 해서만 잠을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다음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만일 예측할 수 있는 얘기라면 청중들은 잠이 들어버리거나 얘기꾼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오. 이 얼마나 위험한가. 이를 피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성급한 폭군으로부터 목숨을 지킨 왕비 세헤라자데의 무기는 미모나 지식이나 수사학 따위가 아니라 바로 이 ‘마음 졸이게 함’이었던 것. 잠깐, <천일야화>를 누가 모르랴,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라고 누군가 불만을 터뜨리더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참이오. 독자인 우리는 세헤라자데의 남편과 같으니까. 이 사실을 이씨가 복창하고 있소.

주인공은 세 권의 소설을 낸 바 있는 작가 가공한. 동네 커피점을 옮겨 다니며 소설을 쓰고 있군요. 어느 날 제법 무게깨나 나가는 낯선 여자가, 나는 댁을 잘 안다, 이 커피점에 한 달 열흘 만에 나타나지 않았느냐, 라고 불쑥 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덧붙이기를 ‘나’ 때문이란 것도 알고 있다고. 뿐인가. 틈도 주지 않고 “나 때문에 왔고, 또 나 때문에 안 온 거지요”라고 다그치지 않겠는가. 어처구니없는 노릇. 댁을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한 달 열흘 동안 이 커피집에 오지 않은 것을 댁과 결부시키는 이유가 뭐냐고 따질 수밖에. 바로 이게 화근. 어째서?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고 질문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가 그것.

이에 비해 세 번째 독법인, 이른바 세속적인 주제(의도)란 얼마나 초라한가. 작가라면 누구나 갖는, 세상 독자 모두가 자기 작품의 독자라고 우기고 싶은 욕망. 그것은 곧 시민계급의 위대한 진취성의 근거이긴 하나, 인류사의 시선에서 보면 어떠할까. 두 번째 독법과 어찌 감히 견줄쏘냐.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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