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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오디세우스의 후예들

등록 2012-08-19 20:08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의 문학산책
1990년대 중반에 창간된 모 계간지의 전략은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였소. 당시로서는 압도적인 분량이 그 하나. 다른 하나는, 이 점이 중요한데, 싹이 보일 법한 신진 작가의 다각적 조명. 거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소. ‘자전소설’을 한 편 써야 된다는 것.

“보바리 부인은 나다”라는 말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는 패기만만한 신진 작가라도 골리앗 같은 계간지 앞에 직면하자 일단 기가 죽을 수밖에요. 고민 끝에 고안해낸 것이 손쉬운 타협점 찾기. 유년기에서 시작, 가족, 동네, 학교, 만사람, 영향 받은 인물이나 책 등, 자전적인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가 그것. 요컨대 어디서 나고 어느 골짜기의 물을 먹고 자랐는가만큼 중요한 것이 어찌 따로 있을까 보냐.

만고의 진리이긴 해도 작가로서는 이것으로는 역부족인 것. 어째서? 모두가 비슷하니까. 자기만의 성장기가 작가 되기에 걸려 있는 만큼 남보다 다른, 이른바 ‘튀는 곳’이 있어야 하는 법.

이 장면에서 뚫고 나갈 방도는 무엇인가. 아니, 도대체 그런 방도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런 가혹한 시련을 모 계간지는 18년이나 신진 작가에게 강요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태세. 21세기에 접어들자 신진 작가들의 도전이 불가피했소. 타동사 아닌 자동사로 쓰는 모든 소설은 어김없이 자전 소설이 아니겠는가. 여기에다 또 자전 소설을 쓰라니 말도 안 된다.

아니, 되긴 된다. 그냥 자동사로 쓴 소설 한편을 ‘자전 소설이다!’라고 내세워 골리앗에게 돌팔매질을 했던 것. 이 싸움의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 아니 과연 승자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소.

다윗들의 전략을 우선 보시라. 이 전략을 <사이렌의 침묵>에서 카프카는 이렇게 썼소. “사이렌은 노래보다 더욱 무서운 무기를 갖고 있었다”라고. 이 사실을 누구보다 꿰뚫어 본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아티카의 왕 오디세우스. 운명의 신들조차도 속이는 꾀 많은 오디세우스인지라 귀를 밀랍으로 막고 몸을 돛대에 매어, 그런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사이렌 앞으로 항해했다 하오. 사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황홀한 몸짓으로 말이외다. 이에 대해 카프카는 이렇게 썼소. 기겁한 것은 사이렌 쪽이라고. 또 썼소. “만일 사이렌들이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녀들은 그때 파멸되었을 것이다”라고.

‘자전 소설’을 쓰라고? 좋다. 못 쓸까 보냐. 모든 소설은 자동사로 쓰는 것. 누구보다 이 사실을 당신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길은 카프카의 지혜일 수밖에.

소설이란 새삼 무엇이냐. 얘기의 일종이긴 해도 근대의 산물인 것. 기껏해야 200~300년밖에 안 된 것. 근대를 지탱한 두 기둥이 흔들리고 해체되는 시기에 오자, 언어가 기둥일 수밖에. 언어란 누가 보아도 불투명체인 것. 자동사가 제일 잘 들어설 수 있는 것. 다윗들이 돌팔매질로 골리앗의 이마를 겨냥하는 길은 단 하나. 오디세우스의 몸짓을 흉내내기.

이미 타동사가 사라진 소설이지만 흡사 아직 살아 있는 듯이 황홀한 시늉을 해 보이기가 그것. 그러니까 자전 소설의 음미 방법은 이 시늉 짓의 밀도에서 올 수밖에. 모 계간지가 요구하는 것의 소설사적 의의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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