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봉보부인 백씨의 인생역전

등록 2020-02-28 06:00수정 2020-02-28 10:49

[책&생각] 이숙인의 앞선 여자

일러스트 장선환
일러스트 장선환

봉보부인 백씨(白氏)가 죽자 34살의 국왕 성종은 슬픔을 가누지 못한다. 그녀가 몸져누운 며칠 사이 왕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을 정도로 애정이 각별했다. 왕은 백씨의 ᅌᅨ장(禮葬)을 종1품의 종친과 재상의 관례로 행하라고 명하고, <경국대전>에도 이 항목을 보완해 넣었다. 백씨의 장례식에는 그녀로 인해 벼슬과 부귀를 얻은 자들이 보답이라도 하듯 문전을 가득 메웠다. 법전을 수정할 정도의 힘을 가진 여성, 왕이 정성을 다하는 이 여성, 백씨는 누구인가.

백씨는 성종의 유모(乳母)다. 유모는 젖먹이 3~4년 동안의 양육을 전담하는 오래된 직업이다. 유모에 대한 복상(服喪)의 의무가 있고 기리는 제문들이 많은 것을 보면, 왕실이나 양반가의 관행이었던 것 같다. 왕비나 후궁의 출산 기록을 보면, 삼칠일은 산모의 젖을 먹고 이후는 유모에게 맡겨졌다. 아이의 품성은 유모에 의해 결정된다는 속설이 있는 만큼 유모의 건강과 성격을 중시했다. 특히 왕이 될 세자나 대군의 유모는 양반가의 처첩으로 제한했지만, 쉽지 않았는지 대개는 왕실의 여비에게 주어졌다. 양육한 아이가 왕이 되었을 때 그 유모는 종1품 봉보부인(奉保夫人)에 봉해지는데, 세종 때 나온 제도다. 여자들의 봉작이 남편이나 아버지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봉보는 오로지 자신의 역할로 얻은 것이다.

백씨는 원래 경혜공주의 여비로 이름은 어리니(於里尼), 남편 강선(姜善)도 같은 집 가노였다. 세조의 찬탈로 단종의 누나 공주 주변도 풍비박산이 난 가운데, 아이를 낳은 젊은 여비는 같은 시기에 태어난 성종의 유모로 발탁된다.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차남인 성종은 2달 만에 아버지를 잃게 되고, 젖먹이에게 몰두할 수 없었던 어머니 대신 유모의 품에서 성장한다.

성종의 즉위와 함께 그녀는 면천되어 양인이 되는데, 3촌 이내의 가족에도 적용되었다. 봉보부인이 된 백씨는 왕실 어른의 자격으로 대비들과 함께 왕비 간택에도 참여한다. 남편 강선은 벼슬이 당상(堂上)에 이르고, 아들 강석경(姜碩卿)은 왕을 밀착 호위하는 정3품 겸사복(兼司僕)이 되었다. 해마다 이들 가족에게 내리는 쌀과 콩이 수십 석이었으며 말과 노비는 물론 춘궁 조성에 쓰일 재목 일부를 백씨 집에 하사하기까지 했다. 영화나 소설 속 유모가 자신이 기른 아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정도였다면 백씨는 욕심이 많고 수완도 좋았다.

이에 봉보부인에 빌붙어 벼슬을 구하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문을 활짝 열어 그들을 상대한 결과 가산은 점점 불어났고, 추종하는 자가 길에 가득했다. 왕을 직접, 자주 만나는 봉보부인은 관찰사, 이조참판, 병마절도사 등을 따내고, 노비 송사나 공납에도 관여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30년이 넘는 여비 신분에서 봉보부인으로 산 20년, 왕의 비호로 백씨가 누린 부귀영화는 죽음과 함께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무덤으로 들어간 지 15년, 연산군은 그녀의 주검을 부관참시하고, 생존해 있던 남편 강선을 능지처사에 처했다. 자신의 어머니 윤씨가 폐위당할 때 곁에서 부왕을 부추긴 죄목이었다. 왕을 등에 업고 벼슬을 팔아 뇌물을 챙기는 등 전형적인 권력형 범죄를 저지른 그녀지만, 역사 속 한 줄 평가는 ‘매우 총명함’으로 나온다. 하기야 미천한 여비에서 종1품의 관작을 얻고 죽을 때까지 권세를 휘둘러도 뒤탈을 남기지 않은 것을 보면 보통 총명은 아닌 것 같다. 저항할 수 없는 죽은 몸이기에 그렇지 살아 있었다면 또 다른 역전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