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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대정 벌판의 따뜻한 바람, 정난주

등록 2020-07-16 21:38수정 2020-07-17 14:44

[책&생각] 이숙인의 앞선여자

일러스트 장선환
일러스트 장선환
제주도 남단 모슬포 뒷산에 잠든 ‘한양 할망’ 정난주 마리아는 새로운 조선을 꿈꾸었던 여성들의 역경과 극복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제주가 맞이한 첫 신앙인으로 기록된 그녀는 1801년 천주교도 박해 때 29살의 나이로 대정읍의 관비(官婢)에 부쳐져 37년을 살았다. 천수를 다한 삶이었다. 본명 정명련(丁命連) 대신에 난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관비가 되면서 붙여진 것 같다. 정명련이라는 이름 석자는 <승정원일기> 1801년 11월7일자 기록에도 나온다.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황사영의 어미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의 관비로 삼고, 처 정명련은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로 삼고, 아들 경한은 두 살인 까닭에 법에 의해 교형을 면제하여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관노로 삼는다.” 그렇다. 정명련의 남편은 서양 선박을 끌고 와 조선을 혼내 달라는 내용이 든 <백서> 사건의 주인공인 그 황사영이다.

정명련은 1773년 정약현과 경주 이씨의 맏딸로 태어나 아래로 두 여동생을 두었는데, 8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다산 정약용의 조카이기도 그녀는 18살 때 두 살 아래의 황사영과 혼인을 한다. 16살 진사합격으로 정조 임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전도유망한 청년을 당시 명문가 정씨 집안에서 탐을 낸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숙부 정약전·정약종·정약용, 외숙 이벽, 고모부 이승훈 등은 18세기 마지막을 장식한 최고 지성들로 서학을 천주교로 발전시킨 핵심 멤버들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증조부 황준의 슬하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황사영은 혼인으로 학문과 인생의 스승들을 한꺼번에 얻게 된 것이다. 명련이 숙부들을 통해 먼저 익힌 천주학을 남편 황사영과 일상의 문답을 통해 나누면서 둘은 신앙의 세계로 질주해 들어갔다.

한편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명련에게 당시 일반화한 모전여습(母傳女習)의 신앙 전수가 어떻게 가능했나. 이벽의 부인인 외숙모 유한당 권씨는 <천주실의>와 <칠극>을 여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언문 번역한 것으로 알려지고, 유교 지식을 천주교리로 해석한, 여성들을 위한 <언행실록>을 짓기도 했다. 명련 자매가 그 최초의 독자였을 것이다. 정명련의 여동생은 기해박해(1839년) 때 남편 홍재영과 함께 순교한 인물이다. 이처럼 숙부들에게 서학 공부를, 고모부 이승훈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정명련의 신앙은 혈당(血黨)의 전방위적인 지원과 훈련을 통해 성장해간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충북 배론으로 몸을 숨기고, 서울 아현에 살던 정명련은 시어머니와 2살 난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서부 감옥에 갇힌다. 결국 체포된 황사영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그들은 9개월의 옥살이를 끝내고 바로 유배길에 오른다. 서로 의지해 내려오다가 시어머니는 거제도로 향하고, 자신은 젖먹이 아들을 안고 제주도를 향해 간다. 배는 추자도에 들러 관노에 배정된 황경한을 내려놓을 것이다. 그런데 관노이어야 할 황경한은 보통의 양민 황씨로 성장했고, 어부 오씨 부부가 거둬 키운 사실이 밝혀졌다. 여기서 엄마 정명련이 아이의 옷섶에 황경한이라는 이름 석자를 써 둔 사실과 관노로 인계되기 전에 모종의 작업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를 두고 뱃머리를 돌릴 때 명련의 심정은 문학적 상상력에 맡길 수밖에 없다.

“경한아, 네가 살아가게 될 땅이다. 죽어서는 아니 된다. 악착같이 살아남아 언젠가는 꼭 만나자꾸나. 나는 네가 황사영, 정난주의 아들이 아닌 경한 네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양반도 천출도 아닌 이 땅을 살아가는 보통의 양민이 되어, 때론 주리고 고통받겠으나 강인함으로 살아남아 끝끝내 또 다른 생명을 일구어가는 그러한 사내로 말이다.” (김소윤 소설 <난주>)

배교의 대가로 얻은 이른바 종년의 신분, 갖은 천대와 멸시에 노출된 삶이지만 병들고 헐벗은 자들을 돌보며 살아낸 37년의 세월 그 자체가 순교였다고 한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고통과 차별이 닥칠지라도 정명련이 매일 순교하듯 그 신앙을 지켜내었듯 우리 또한 묵묵히 문제들을 헤쳐나갈 것이다. ‘앞선 여자’들을 위로하며, ‘앞으로의 여자’들을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끝>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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