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앞선 여자
홍혜완(洪惠婉)의 남편은 다산 정약용이다. 남편이 조선을 대표하는 대학자라면 그 아내의 삶도 이에 상응하는 무언가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가질 법하다. 과연 홍혜완(1761~1838)은 지기(知己)이자 아내로서 다산의 삶을 이끈 장본인으로, <다산시문집> 곳곳에 그 증거들이 전해온다. 벗처럼 말이 통하고 함께 천수를 누린 점에서 그들의 부부 운은 만점에 가깝다. 다산은 “내 아내는 흠잡을 것이 없지만 아량이 좁은 것이 흠”이라는 투정도 해보지만 아내를 향한 인간적 사랑과 잔잔한 배려는 고금을 통틀어 과히 독보적이다. 그런데 이 부부의 역사를 홍혜완 쪽에서 서술해본다면 보이지 않았던 다른 사실이나 감정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홍혜완은 15세 신랑으로 만난 다산과 60년 동안 부부의 삶을 일구었다. 무관 홍화보(1726~1791)의 2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난 그녀는 혼인한 다음해 어머니 이씨의 부음을 듣는다. 이복 언니나 두 오라비가 있지만 사위 다산에 대한 자부심이 컸던 아버지는 부부의 앞날에 물심 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어린 부부는 아버지들의 임지인 화순과 진주를 차례로 방문하는데, 이때 병마절도사 아버지는 논개의 의기사를 보수하여 사위 다산에게 기문을 쓰게 한다. 인근을 여행하며 1년 반을 보내고 혼인 5년차에 접어든 봄에 서울로 돌아온다. 이로부터 다산은 성균관 입학과 과시 준비 그리고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학자 관료로 성장하기까지 20년, 홍씨는 6남 3녀의 아이를 낳고 4남 2녀의 아이를 떠나보냈다. “죽은 아이가 살아난 아이의 두배”라며 시로 읊은 아버지 다산의 슬픔은 어머니 홍씨의 고통에 비하면 차라리 가벼운 것이다.
부부의 살림은 다산의 공직생활에도 그리 녹록치 않았던 것 같다. 홍씨가 누에를 쳐서 ‘초라한 생계’를 이어가면, 다산은 연작시를 지어 그 노고에 보답한다. 시에는 “한 뙈기만 심어도 열집 옷이 나오는 한달짜리 누에 치기가 삼농사 목화농사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실학자다운 계산이 나온다. 신유박해에 연루된 다산이 유배길에 오르자 한강 남쪽 마을 사평(沙坪)에서 눈물로 이별하고 마재로 돌아온 홍씨, 어린 아이들을 지키고 생계를 주도하며 아버지와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나간다. 다시 누에치기에 몰두하자 남편은 편지로 “뽕은 어린 딸 시켜 따오게 하고, 힘든 일은 아들놈을 시키시오”라며 힘을 실어 준다. ‘병든 처[病妻]’로 불린 홍씨의 고단한 일상은 강도 높은 노동보다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지기의 온전한 귀향을 기다리는 시간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것도 무려 18년을. 와중에 막내아들 농이를 잃게 되는데, 죽음이 임박해서도 아버지가 보냈다는 소라 껍질 2개를 기다리던 4살박이 아들이었다. 다산은 아버지로서 자신의 슬픔보다 아이 어머니의 처지를 더 슬퍼하며 두 아들에게 ‘엄마를 보호하라’는 영을 내린다.
홍혜완만큼 부부관계를 원만하게, 그리고 남편의 존중을 받으며 산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폐족의 위기에서 다시 살아난 가족은 강진 초당에서 마음으로 기원한 다산과 실전의 상황을 몸으로 막아낸 홍씨의 합작품이다. 가시밭길을 꽃길로 가꾼 셈이다. 그런데 18년을 기다린 선물이 남편의 첩과 그 아이라니! 근래 발굴된 <남당사>라는 16수의 한시는 다산의 첩과 딸 홍임의 존재를 알려왔다. 작자 미상의 시는 해배된 다산을 따라 마재 본가까지 왔다가 초당으로 다시 돌아간 첩의 마음을 담은 것이다. 시에는 곤혹스런 다산의 처지도 보이고 ‘아량이 좁은’ 홍씨의 비애도 보인다. 과거에 홍씨는 흑산도의 자산 정약전이 첩에서 아들 둘을 얻자 예(禮)에 하자가 없다 한들 본가의 동서가 삶의 위안을 얻도록 인정(人情)을 따를 것을 주문한 바 있다. 이로 볼 때 다산이 첩을 돌려보낸 것은 긴 세월을 함께한 아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예의지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홍혜완의 무언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산이 자신의 학문과 자신의 역사에 몰두하는 동안 홍혜완은 가족과 함께하는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일러스트 장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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