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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머리규제가 꿈마저 규제 처벌 대상은 되레 ‘세상’

등록 2006-04-26 21:44

저공비행
보충수업을 받듯이 세계 영화사의 걸작들을 보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누군가 구로사와 아키라나 마틴 스코세이지의 비디오를 구했다고 하면 다들 그 사람의 집으로 달려가 그 영화를 함께 봤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도 친구 집에서 여럿이 본 영화다. 영화를 보다가 다들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난다. 돼지 포르코가 “날지 못하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다”라는 말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그 대사가 왜 그렇게 웃겼는지 모르겠다. “취하지 못하는 학생은 그냥 학생일 뿐이다”라는 식으로 대사를 바꿔가며 농을 치던 기억도 난다.

암스테르담에서 ‘날아가는 돼지(플라잉 피그)’라는 이름의 유스호스텔을 봤을 때, 당연히 포르코의 그 대사가 떠올랐다. 세상에서 포르코의 그 대사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바로 암스테르담이 아닐까 한다. 암스테르담 사람들은 상상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을 다 허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존엄하게 죽을 수 없는 환자는 그냥 환자일 뿐이며(안락사) 스스로 누리지 못하는 마약은 그냥 마약일 뿐이다.(소프트드럭)

마찬가지로 머리를 기르지 못하는 군인은 그냥 군인일 뿐이라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책에서 우연히 머리를 치렁치렁 기른 남자 군인들의 사진을 봤을 때, 나는 〈붉은 돼지〉를 볼 때처럼 깔깔거리고 웃었다. 책에는 군인의 장발 문제를 두고 네덜란드 사회가 토론했다고 씌어 있었다. 그 토론의 결과, 군인들에게도 머리를 기를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 얘기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돼지처럼 신선했다.

목동의 중학생들이 머리 규제를 완화해달라고 시위를 벌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주도 학생들을 징계하겠다는 학교 쪽의 발표가 나왔다. 그 때문인지 최근에 출교를 당해 삭발을 한 고려대 학생들이 떠올랐다. 고려대 학생들이 스스로 자른 머리칼은 목동의 중학생들이 그토록 기르고 싶었던 그 머리칼일 것이다. 시위를 해서라도 기르고 싶었던 그 머리칼을 몇 해 뒤 학생들 스스로 자르게 만드는 사회는 그냥 사회일 뿐이다. 왜 목동의 중학생들은 머리카락을 기르고 싶어하고 고려대 학생들은 머리카락을 잘라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건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되는 목동의 살인적인 입시 경쟁과 고려대학교 안암동 캠퍼스와 병설보건대 사이의 보이지 않는 차별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선생님 말 잘 들으며 머리 빡빡 깎고 열심히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니 ‘아두가단 아발불가단’을 외워댔으나 세상은 내가 살던 때보다 더 나빠지는 것 같다.

이 모든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중학교 시절에 머리를 빡빡 깎고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대학생이 되더라도 차별받을 것이며, 그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머리를 빡빡 깎게 될 것이라는 뜻일까? 이런 끔찍한 세상에 맞서 우리 학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바로 학칙을 뒤져 처벌을 내리는 일이라니.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이 세상을 대신해 학생들이 처벌받으면 안 된다.

그러니 학교 쪽아, 제발 그 누구도 처벌하지 마라. 배울 학, 학교 교. 너희는 배워주는 곳이 아니더냐?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것이냐? 꿈꾸는 방법을, 이 세상을 날아다니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처벌하지 말고 가르쳐만 줘도 고맙겠다. 처벌하는 곳은 법정이고 교도소다. 날지 못하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지만, 가르치지 못하는 학교는 그냥 학교도 되지 못한다.

김연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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