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1월 고교 1학년 과정이 끝나갈 무렵 누마즈에서 아버지(가쓰오)와 함께 찍은 사진.
와다 하루키 회고록/③ 최초의 사회적 발언
내가 시미즈 고등학교에 들어간 1953년 4월에는 조선(한국)전쟁이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그 전 해에 경찰예비대는 보안대가 되고 일본해군 전통을 이어받은 해상경비대가 창설됐다. 그 해에 일본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시노하라 세이에이가 편찬한 <우리는 거부한다-동서독 청년들이 보낸 편지>(고분샤·光文社)였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경험한 독일 청년들이 독일 재군비에 반대하는 생각을 써내려간 편지들을 모은 책이었다. 그들 나라도 미국 소련에 의해 분할돼 두개의 나라가 돼 있는 상태에서 조선전쟁을 공포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한 청년은 이렇게 썼다.
“조선전쟁 상황을 보고, 나는 만일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한다면, …아무리 슬플지라도 지금 이 상태대로 견디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을 제2의 조선으로 만드는 일 따위는 결단코 거부합니다.”
일본의 재군비 움직임을 당시 고교 1년생이던 나도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고교에 들어가 가입한 ‘독일어부’에서 문화제에 발표를 하기로 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부한다>는 독일 청년의 생각을 구성극풍으로 꾸며보자고 나는 제안했다. 독일어부 부원 9명은 심하게 대립했다. 재군비 절대반대 2명, 반대 3명, 대체로 반대 1명으로,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재군비 찬성 1명, 무조건 찬성 1명, 공격적 재군비 찬성 1명으로, 찬성파도 완고했다. 결국 재군비파 한사람이 곧 독일어부를 떠나고 또 한 사람은 재군비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한 사람은 대세에 따라 참가 쪽을 택해 문화제 출연은 실현됐다. 내 생각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소련이나 중국이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9월의 문화제 직후 내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 있었다. 그 해 4월15일부터 제2차 한일회담이 시작된 것이다. 일본 쪽 수석대표는 구보타 간이치로였다. 7월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한반도에 불안정한 평화가 찾아오자 제3차 회담이 10월6일부터 재개됐다. 이 회담이 10월15일 청구권위원회에서 나온 구보타 대표 발언으로 결렬됐다. 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란이 벌어졌다.
한국 쪽이 먼저 “일본의 한국 내 자산은 미군정부 법령에 따라 접수됐다, 본래대로라면 우리는 36년간 일본지배 하에서 한민족이 당한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만 그 요구를 유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기 사실에 비춰 우리는 일본 쪽이 청구권을 철회하기 바란다.”(이하 인용 내용은 <아사히신문> 1953년 10월22일치에서) 이에 대해 구보타 전권대표는 “그렇다면 일본 쪽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 왜냐하면 일본은 36년간 조선의 헐벗은 산을 푸른 산으로 바꾸었고, 철도를 부설했으며, 논밭을 늘리는 등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반론했다. 한국 쪽은 마치 일본이 점령하지 않았다면 한국인은 잠자고 있었던 듯 얘기하지만 일본한테 점령 당하지 않았다면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반박했고, 이에 대해 다시 구보타 전권은 우리 외교사 연구를 보면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다른 나라에 점령당해 더욱 비참한 상태가 됐을 것이라고 반격했다. 거기서 한국 쪽이 그렇다면 어떻게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노예상태”가 언급됐는가, 어찌해서 일본은 카이로선언을 받아들였는가 라고 추궁하자, 구보타는 카이로선언은 “전쟁중 흥분상태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받아쳤다. 한국 쪽은 총독의 보호 하에 축적된 일본인 재산 몰수는 한국인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새롭고 더 높은 이상의 이름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구보타는 샌프란시스코조약 전에 독립한 것은 “일본 처지에서 보면 이례적인 조처였다”고 큰소리쳤다.
여기서 구보타가 말한 것은 그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일본정부의 견해였다. 두 정부 사이에는 원칙적인 대립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 쪽은 10월21일 본회담에서 구보타 발언을 5개 항목으로 정리해 모두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한국 쪽 대표는 “옛 일은 흐르는 물에 흘려 보내고, 미안하다는 생각”을 일본 쪽이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것이 한일회담의 기초이며, 이에 관해 “우리 쪽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보타는 이를 거부했고 회담은 결렬됐다.
일본정부는 결렬 원인이 된 것은 “의제와 관계없는 문제”, “회담의 비공식적인 한 분과위원회에서의 사소한 언사”를 “일부러 왜곡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 쪽을 비난했다. <아사히신문> 사설도 정부성명의 이 “사소한 언사”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정부에 동조했다. 사회당은 좌우 두 파로 나뉘었으나 두 파 모두 결렬 원인을 이승만정권의 배외적 독재주의에서 찾는 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이 반한국 합창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그 날 10월22일 일기에 나는 <‘일한회담’ 결렬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일한회담은 결렬됐다. 어민에겐 사활의 문제인 이승만 라인의 폐기 실현이 이로써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됐다. 단지 이승만 라인 문제만 보더라도 실로 중대한 문제지만, 나는 이 문제를 둘러싼 각 방면의 움직임에 실로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결렬 뒤 정부성명을 보면, 정부는 결렬 원인이 된 것은 ‘의제와 관계없는 문제’, ‘회담의 비공식적인 한 분과위원회에서의 사소한 언사’를 ‘일부러’, ‘고의로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 문제가 과연 ‘사소한 언사’일까. 일본정부 대표는 ‘일본의 조선통치는 조선인에게 유익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정부는 36년간 많은 돈을 조선을 위해 지출하고 조선인의 이익을 꾀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포츠담선언이 배격한 중심 내용인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에 전면적으로 찬동하는 것이다. 이는 다년간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조선인민이 절대로 승복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일본의 36년간에 걸친 통치는 조선을 일본의 노예로 만들고 모든 부와 재산을 앗아갔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인에게 모국어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한국 쪽 대표가 말했듯이 ‘옛 일은 흐르는 물에 흘려 보내고, 미안하다는 생각’을 일본쪽이 할지 말지는 일한회담의 기초이며 근본이고, 이에 관해 한국 쪽이 ‘우리 쪽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한 것은 당연했다. 정부는 이 근본문제를 말초적 사건이라고 둘러침으로써 회담결렬 책임을 일방적으로 한국 쪽으로 전가하려 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정부 쪽이 신속히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요시다 정부가 그것을 인정할 리가 없다) 이승만 라인 문제에서 한국 쪽이 양보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려 하지는 않고 사회당 두 파는 결렬의 책임이 근본적으로 이승만 정권의 배외적 독재주의에 있고, 거기에 덧붙여 요시다 내각의 자주성 결여 외교정책, 무위무책 탓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 쪽 주장은 단지 저 독재자 이승만의 의지가 아니다. 전 조선반도를 통해 다년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온 조선민중의 소리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이승만의 독선으로 치부하는 것은 요시다 정부의 외교를 비호하는 것일 뿐 아니라 반조선적인 국내 기운을 고조시켜 재군비를 추진하려는 것이다.”
이런 나의 판단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현대중국론>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방일한 (대만의) 장쥔의 발언에 대해, 국민당 요인의 발언이기 때문에 경청한다거나 무시해서는 안되며 그것이 민족의 소리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 다케우치 얘기의 ‘장쥔’ 자리에 나는 이승만 정권 대표를 바꿔 앉혀 놓고 생각했다. 다케우치의 방법을 배우고 이시모타의 책에서 얻은 조선사 인식을 토대로 내 나름의 견해를 세웠던 것이다. 조선식민지 지배가 이 민족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거기에 분노하고 일본인의 응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북과 남의 구별 없는 전 조선민족의 소리다. 이 소리를 듣고 역사를 분명히 인식해서 죄송하다는 사죄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안된다.
이 글은 어디에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글을 씀으로써 일본과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자세를 스스로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50년간 나는 이 견해를 지켜왔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이시모타 쇼의 <역사와 민족의 발견>(왼쪽)과 다케우치 요시미의 <현대중국론>.
일본정부는 결렬 원인이 된 것은 “의제와 관계없는 문제”, “회담의 비공식적인 한 분과위원회에서의 사소한 언사”를 “일부러 왜곡한”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 쪽을 비난했다. <아사히신문> 사설도 정부성명의 이 “사소한 언사”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정부에 동조했다. 사회당은 좌우 두 파로 나뉘었으나 두 파 모두 결렬 원인을 이승만정권의 배외적 독재주의에서 찾는 담화를 발표했다. 나는 이 반한국 합창이 부당하다고 느꼈다. 그 날 10월22일 일기에 나는 <‘일한회담’ 결렬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일한회담은 결렬됐다. 어민에겐 사활의 문제인 이승만 라인의 폐기 실현이 이로써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됐다. 단지 이승만 라인 문제만 보더라도 실로 중대한 문제지만, 나는 이 문제를 둘러싼 각 방면의 움직임에 실로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결렬 뒤 정부성명을 보면, 정부는 결렬 원인이 된 것은 ‘의제와 관계없는 문제’, ‘회담의 비공식적인 한 분과위원회에서의 사소한 언사’를 ‘일부러’, ‘고의로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 문제가 과연 ‘사소한 언사’일까. 일본정부 대표는 ‘일본의 조선통치는 조선인에게 유익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정부는 36년간 많은 돈을 조선을 위해 지출하고 조선인의 이익을 꾀했다’고 말했다. 이것은 포츠담선언이 배격한 중심 내용인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에 전면적으로 찬동하는 것이다. 이는 다년간 일본제국주의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조선인민이 절대로 승복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일본의 36년간에 걸친 통치는 조선을 일본의 노예로 만들고 모든 부와 재산을 앗아갔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인에게 모국어로 말하는 것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한국 쪽 대표가 말했듯이 ‘옛 일은 흐르는 물에 흘려 보내고, 미안하다는 생각’을 일본쪽이 할지 말지는 일한회담의 기초이며 근본이고, 이에 관해 한국 쪽이 ‘우리 쪽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한 것은 당연했다. 정부는 이 근본문제를 말초적 사건이라고 둘러침으로써 회담결렬 책임을 일방적으로 한국 쪽으로 전가하려 하고 있다. 이 문제에서 정부 쪽이 신속히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요시다 정부가 그것을 인정할 리가 없다) 이승만 라인 문제에서 한국 쪽이 양보하기란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태도를 비판하려 하지는 않고 사회당 두 파는 결렬의 책임이 근본적으로 이승만 정권의 배외적 독재주의에 있고, 거기에 덧붙여 요시다 내각의 자주성 결여 외교정책, 무위무책 탓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한국 쪽 주장은 단지 저 독재자 이승만의 의지가 아니다. 전 조선반도를 통해 다년간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온 조선민중의 소리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이승만의 독선으로 치부하는 것은 요시다 정부의 외교를 비호하는 것일 뿐 아니라 반조선적인 국내 기운을 고조시켜 재군비를 추진하려는 것이다.”
와다 하루키/도쿄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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