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의 눈
디아스포라의 눈
일본에서 온 〈엔에이치케이〉(NHK) 텔레비전 촬영 팀과 함께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다녀왔다. 대형 인터뷰 프로에서 나를 다루기로 한 모양이다. 프로 제목은 ‘단절의 증언자와 함께 살아간다’.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나 한국 군사정권 시대를 정치범 가족의 일원으로 겪어낸 내가 지금 한국에 장기체류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차분하게 들어보겠다는 기획이다. 그 장소로 내가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지정한 것이다. 피디(PD) 가마쿠라 히데야씨, 카메라맨 나카노 히데요씨와는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다. 예전에 나는 그들과 함께 유대계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의 생애를 더듬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다. 레비는 아우슈비츠라는 ‘사건’의 증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참극이 되풀이될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그 증언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을 드러내 보여준 ‘단절의 증언자’이기도 했다.
나의 형 두 사람은 저 시절에 이 서울구치소에 있었다. 1971년 4월 박정희 대통령과 야당 후보자 김대중씨가 치열한 선거전을 펼치면서 학생·지식인의 박정희 3선 저지운동이 한창 고조되고 있던, 투표 1주일 전 ‘학원간첩단사건’이 대대적으로 발표되고 그 결과 운동은 위축됐다. 그 ‘간첩단’ 주모자로 공표된 사람이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에 다니던 나의 형 서승과 서울 법대생이던 준식이다.
햇볕이 내리쬐는 더운 오후 나와 촬영팀은 3·1독립선언기념탑에서 역사관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정문은 일제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서승은 그 색깔을 “피를 빨아들인 듯한 검붉은 벽돌”이라 표현했다. 우리는 입구를 지나 안에 들어간 뒤 옥사 쪽으로 갔다.
1987년 서울구치소를 이전할 때 9, 10, 11, 12사동, 한센병 환자 격리사동, 그리고 사형장은 사적으로 보존됐다. 서승은 10사 17호 방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10사는 보존을 위해 들어가는 걸 금지하고 있다. 유일하게 우리가 들어가볼 수 있었던 곳은 12사다. 통로 양쪽에 감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예전엔 수인들로 꽉 차 있었다. 그럼에도 쥐죽은 듯 조용했을 것이다. 감옥의 수인들에겐 마음대로 소리를 낼 권리조차 없었던 것이다.
“‘단절의 증언자’가 되어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다. 일제지배의 아성이자 유신체제에 나의 두 형이 갇혀 있던 곳. 그러나 지금은 ‘일본인’의 잔인성만 남아있을 뿐 해방 뒤 무고한 정치범들이 받은 탄압과 흘린 눈물은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또다시 찾아온 기억의 계절, 그것을 증언하는 것은 평화와 인간성을 위한 싸움이다.”
나는 세계 각지의 강제수용소 유적들을 많이 보며 돌아다녔다. 아우슈비츠에는 세 번 갔다. 그밖에도 다하우, 부헨발트, 벨기에의 브렌동크 등. 옛 동베를린에서 슈타지(비밀경찰) 취조실도 본 적이 있다. 그런 것들은 한마디로 말해 인간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파괴하기 위한 장치다. 일제 식민지지배의 아성이고 유신독재체제의 성립기에 형들이 한때 갇혀 있던 이 장소도 또한 인간을 마모시키는 거대한 폭력장치다. 역사관 지하실에는 일제의 독립운동가 고문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전시가 있어 어린이 단체가 줄을 서서 견학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교육은 필요하다. 일본이 잔혹한 식민지지배를 했다는 것,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 다수가 그 역사적 사실을 지금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 전시돼 있는 것은 일제시대의, 그것도 민족주의운동 탄압과 관련된 것에 한정돼 있다. 감방 벽에는 ‘일본인’의 잔인성을 비난하는 많은 낙서가 있었다. 만약 잔인성이 ‘일본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역사란 정말 알기 쉬운 것이리라. 하지만 실제 이 장소는 대한민국 건국 뒤에도 거대한 폭력장치였고 거기서 많은 정치범들이 탄압받고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 관한 전시나 언급은 전혀 없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한 기억의 장은 실은 일면적인 역사인식을 양성하는 장이기도 한 것 같다. 역사관 남쪽은 넓은 공원이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노인들이나 가족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일찍이 ‘1관구’라 불린 구역이고, 서울구치소의 제1사에서 6사까지의 사동이 서 있던 곳이다. 그리고 재소자 접견실도 여기에 있었다. 서승의 회상기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1972년 말 서울구치소에 있을 무렵, 나는 어머니와 짧은 면회를 마치고 방에 돌아왔다. 얼마 있다가 같은 방의 젊은 택시기사가 면회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마침 나 다음으로 같은 접견실에서 면회를 했다. ‘서형, 아까 면회오신 그분이 어머니시죠? 어머니가 접견실 앞마당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땅을 치며 그렇게 우실 수가 없었어요.’ 아까 접견실에서는 내 건강을 염려해 얘기를 들으면서 온화하게 웃고 있었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내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던 어머니였다.”(〈옥중 19년〉 역사비평사) 내 어머니만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 아내들의 눈물이 여기서 흘렀을까. 그 눈물을 삼킨 장소는 지금은 흔적도 없다. 멀리 일본에서 면회를 다닌 어머니는 1980년 5월, 자식들이 해방된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살펴본 뒤 연세대로 발을 옮겼다. 도서관 외벽에 최루탄에 직격당한 이한열 학생을 그린 커다란 걸개그림이 있었다. 그 아래에 있던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더니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연세대에 입학하고 나서 6월항쟁에 대해 알게 됐고, 이한열 선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은 무관심하다. 예컨대 도서관 앞에서 이한열 선배 추모행사가 열렸을 때, 시끄러워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귀찮다는 듯이 말한 학생도 있었다.” 여기서도 심각한 ‘단절’이 있는 모양이다.
한국의 5월, 6월은 기억의 계절이다. 그것을 형식만의 연중행사로 해서는 안 된다.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은 평화와 인간성을 위한 싸움인 것이다. 어떤 곤란이 있더라도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절의 증언자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서경식/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
나는 세계 각지의 강제수용소 유적들을 많이 보며 돌아다녔다. 아우슈비츠에는 세 번 갔다. 그밖에도 다하우, 부헨발트, 벨기에의 브렌동크 등. 옛 동베를린에서 슈타지(비밀경찰) 취조실도 본 적이 있다. 그런 것들은 한마디로 말해 인간을 철저히 고립시키고 파괴하기 위한 장치다. 일제 식민지지배의 아성이고 유신독재체제의 성립기에 형들이 한때 갇혀 있던 이 장소도 또한 인간을 마모시키는 거대한 폭력장치다. 역사관 지하실에는 일제의 독립운동가 고문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는 전시가 있어 어린이 단체가 줄을 서서 견학하고 있었다. 이런 역사교육은 필요하다. 일본이 잔혹한 식민지지배를 했다는 것,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 다수가 그 역사적 사실을 지금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 전시돼 있는 것은 일제시대의, 그것도 민족주의운동 탄압과 관련된 것에 한정돼 있다. 감방 벽에는 ‘일본인’의 잔인성을 비난하는 많은 낙서가 있었다. 만약 잔인성이 ‘일본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역사란 정말 알기 쉬운 것이리라. 하지만 실제 이 장소는 대한민국 건국 뒤에도 거대한 폭력장치였고 거기서 많은 정치범들이 탄압받고 처형당했다. 그러나 그런 것에 관한 전시나 언급은 전혀 없다.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한 기억의 장은 실은 일면적인 역사인식을 양성하는 장이기도 한 것 같다. 역사관 남쪽은 넓은 공원이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노인들이나 가족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일찍이 ‘1관구’라 불린 구역이고, 서울구치소의 제1사에서 6사까지의 사동이 서 있던 곳이다. 그리고 재소자 접견실도 여기에 있었다. 서승의 회상기에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1972년 말 서울구치소에 있을 무렵, 나는 어머니와 짧은 면회를 마치고 방에 돌아왔다. 얼마 있다가 같은 방의 젊은 택시기사가 면회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마침 나 다음으로 같은 접견실에서 면회를 했다. ‘서형, 아까 면회오신 그분이 어머니시죠? 어머니가 접견실 앞마당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땅을 치며 그렇게 우실 수가 없었어요.’ 아까 접견실에서는 내 건강을 염려해 얘기를 들으면서 온화하게 웃고 있었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내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던 어머니였다.”(〈옥중 19년〉 역사비평사) 내 어머니만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 아내들의 눈물이 여기서 흘렀을까. 그 눈물을 삼킨 장소는 지금은 흔적도 없다. 멀리 일본에서 면회를 다닌 어머니는 1980년 5월, 자식들이 해방된 날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는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살펴본 뒤 연세대로 발을 옮겼다. 도서관 외벽에 최루탄에 직격당한 이한열 학생을 그린 커다란 걸개그림이 있었다. 그 아래에 있던 남학생에게 말을 걸었더니 이렇게 얘기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성공회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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