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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100년 묵은 돋보기로 한복에 ‘불멸의 미’ 입혀

등록 2015-10-20 22:37수정 2015-10-23 10:51

[장인을 찾아서] 김덕환 중요무형문화재 금박장
금박의 시작은 문양을 나무판에 새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김덕환 금박장은 1백년 이상 된 ‘특별한’ 돋보기 안경을 쓰고 작업한다. 애초 손잡이가 있던 큰 돋보기였으나 두 손을 사용하기 위해 고무줄로 묶어 머리에 두른다.
금박의 시작은 문양을 나무판에 새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김덕환 금박장은 1백년 이상 된 ‘특별한’ 돋보기 안경을 쓰고 작업한다. 애초 손잡이가 있던 큰 돋보기였으나 두 손을 사용하기 위해 고무줄로 묶어 머리에 두른다.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다. 돋보기 테두리 금속 도금이 거의 벗겨져 나가, 오래된 물건이라는 것이 짐작된다. 손잡이에 검정 고무줄을 묶었다. 머리에 두른다. 마치 잠수하려고 물안경을 쓴 모습이다. 돋보기안경 대용이다. 오래됐다. 아마도 100년이 넘은 것으로 보인다. 정밀한 작업이 필요해 스스로 만든 돋보기안경이다. 집안에 대대로 물려 내려왔다. 한복에 귀한 금박을 입히는 작업이기에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아들도 이수자, 5대째 가업 이어
증조부가 쓰던 작업대 그대로

작업 도구 잃어버릴까
6·25 때도 피난 안 가고 지켜

왕은 용, 왕비 봉황, 공주는 꽃무늬
특별한 날만 입다 죽을 때 수의

목판화 기법은 오직 한국에만
나무판 문양부터 7가지 공정

왕실 후손이 가끔 주문했고
고 정주영 회장도 한꺼번에 30벌

김덕환 장인의 목판 작업 모습.
김덕환 장인의 목판 작업 모습.
임금과 왕비 등 왕실 가족이 입는 한복에 금박 장식을 하는 일을 대를 이어 하고 있다. 언제부터 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기록엔 4대조 할아버지가 조선 왕조 궁궐에서 일을 했다. 철종(재위 1849~1863) 때 증조부인 김완형은 기록에 등장하는 명장이다. 조선시대 왕실의 장례를 기록한 <국장도감의궤>에 금박 제작을 직접 지휘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아들 김원순과 손자 김경용에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119호 금박장 김덕환(80·사진) 장인이 그 일을 잇고 있다. 또 김 장인의 아들 김기호(48)가 아버지를 이어 이수자가 됐으니 5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도 금박 작업을 할 때 쓰는 작업대는 증조부가 쓰던 것이다.

임금의 곤룡포는 금박으로 찍은 용무늬가 새겨지고, 왕비의 옷에는 봉황이, 공주나 옹주의 옷에는 모란, 국화 등의 꽃무늬가 새겨졌다. 금박 옷은 곧 왕족의 권위나 위엄을 상징하는 의상이었다. 워낙 금이 귀하다 보니 왕실에서도 혼인 등 중요한 날에 입었던 금박 의상을 잘 보관했다가 환갑에 다시 입어보고 죽어서는 수의로 사용했다. 왕가의 여성들은 치마에 덧대는 ‘스란’에 금박으로 장식해 붙여 중요 행사 때에만 붙여 입었다. 행사가 끝나면 도로 떼어내어 한지 속에 보관했다. 수의로 마무리가 됐으니 금박 한복은 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김 장인도 옛것을 복원하고 싶지만 실제 왕실 유물은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한다. 사진으로 보고 복원했다.

김덕환 장인이 금박 문양을 입힌 의상.
김덕환 장인이 금박 문양을 입힌 의상.
6·25 한국전쟁 때 서울 종로에 살던 그의 부모는 물려받은 금박 작업도구를 잃어버릴까봐 피난도 가지 않고 버텼다. 일반인들은 거의 입지 않는 금박 의상을 다루다 보니 집안은 어려웠다. 김 장인은 덕수상고 야간에 다니며 낮에는 공장에서 일했다. 오른손 검지 끝마디는 그때 공장에서 일하다가 프레스에 잘려나갔다. 금박 작업은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아버지가 하시던 일이라 그다지 이어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20대 초반부터 가업을 잇기로 결심했다. 어릴 적 고장 난 시계를 분해해서 조립할 정도로 손재주가 좋았다. 아버지는 그에게 단계별로 일을 배울 수 있도록 시켰다. 조각을 배울 때에는 2~3년간 다른 일을 시키지 않고 조각칼을 가는 일만 시켰다. 조각칼을 갈면서 도안에 맞게 칼을 가는 법을 익혔다. 금박 장식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나무판에 문양을 새겨야 한다. 목공예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문양판에 아교를 바르고 한복의 문양을 넣고자 하는 위치에 찍는다. 묻어난 접착제가 완전히 마르기 전에 그 위에 금박지를 붙인 다음, 문양 바깥 부분의 금박지를 다시 떼어내면 된다. 그러니 금박장 기술은 옷의 구성에 어울리는 문양을 고르고 배치하는 안목이 뛰어나야 한다.

김덕환 장인이 금박 문양을 입힌 의상.
김덕환 장인이 금박 문양을 입힌 의상.
7가지 공정 중 금박 입히는 것이 가장 어렵다. “일반적인 서구의 금박공예는 건축물 내·외장이나 가구에 붙이는 공법이죠. 원단 위에 목판화 기법으로 금박 문양을 입히는 제작법은 오직 한국에만 전승되고 있는 전통 기법입니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이미 오래전에 단절됐고, 유물도 없어요.”

왕실의 후손이 가끔 금박 옷을 주문하기도 했고, 고 정주영 현대 회장이 집안 행사를 할 때 금박 옷 30벌을 한꺼번에 주문하기도 했다. 지금 대부분 금박 옷은 가짜 금을 쓴다.

“금은 그 불변성과 아름다움으로 호사와 권위를 상징해요. 몸에도 이로운 광물질입니다. 그래서 금박 옷은 입는 사람의 높은 신분을 나타냈고, 일반인들은 넘보지도 못했어요. 다만 일반 혼례식에서 신부의 도투락댕기와 원삼에만 금박이 허용됐어요.”

김덕환 장인이 금박 문양을 입힌 의상.
김덕환 장인이 금박 문양을 입힌 의상.
금박장은 1973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됐으나 유일한 보유자였던 김 장인의 아버지 김경용 선생이 돌아가시면서 지정이 해제됐다가 33년 만인 2006년 김 장인이 다시 금박장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배나무에 문양을 조각하는 목공예 기술과 바탕 옷감과 날씨에 따른 풀의 변화 등을 예측해 금박문양을 완성하는 기술이 뛰어나다.

“이제는 시력도 나빠져서 세밀한 작업이 어려워요.” 평생 앉은 자세로 작업을 한 탓에 허리가 많이 불편하다. 하지만 고무줄 달린 돋보기안경은 그가 주인이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금박장이란

김덕환 장인이 옷감에 금박을 입히고 있다.
김덕환 장인이 옷감에 금박을 입히고 있다.
직물 위에 얇은 금박을 이용해 다양한 문양을 찍어내는 기술을 보유한 장인이 금박장(金箔匠)이다. 삼국시대부터 이 기술을 사용해 왔다. 고려시대의 금박 옷이 전하지만, 연대가 확인된 건 조선 순조의 덕옹공주(1822∼1844)가 혼례 때 입었던 원삼이 유일하다. 조선시대에는 금박장이 중앙 관청의 경공장에 소속되어 있었고, 지방의 외공장에 소속된 장인의 기록에는 없어 금박의 사용이 주로 왕실임을 알 수 있다.

금박은 순금에 약간의 은을 섞어 얇게 두드려 만든다, 결이 단단한 나무판에 여러 문양을 새긴 뒤 그 위에 금박을 얹고 접착제를 바른 다음, 옷감을 놓고 두드리면 문양이 나타난다. 나무판은 배나무,밤나무,대추나무를 사용했고, 아교(동물의 힘줄)나 어교(민어 부레)를 접착제로 썼다. 금박은 접착제의 성능이 중요해서 조선시대는 풀을 만드는 명장을 따로 두기도 했다.

금박문양은 복식의 종류와 사용자의 신분에 따라 엄격히 제한됐다. 부귀, 권력, 공명, 장수, 평안, 자손번창의 기원을 문양에 담았다. 문양 중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양이 용과 봉황이나 복(福)·수(壽)·희(喜)·만(卍)자 등의 글자문양도 풍부하게 사용됐다. 또 다남(多男), 다복(多福), 다수(多壽)를 의미하는 삼다(三多)의 의미로 복숭아, 석류 등의 과실문양도 많이 쓰였고, 거북, 학, 벌, 나비, 박쥐 등의 문양도 사랑과 복을 부르는 문양으로 사용됐다.

이길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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