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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하늘이시여 동어반복을 용서하시나요

등록 2006-04-12 23:19

이야기TV
지난 4월1일 방영된 에스비에스 주말극 <하늘이시여>. 홍파는 영선네 식구를 저녁에 초대하는데, 영선의 독백. “오빠와 어머님은 자경이 못알아채실 거야.”왕모와 자경, “(만나면) 위로말씀 건네야 할까?” 홍파 모자, “절대 늦으면 안돼.” 다시 영선, “저녁 모임 나가기 싫으면 이야기해.” 결국 50분 방영 시간 중 15분을 주인공들이 이 가족 모임에 대해 중언부언하다 끝난다. 동어반복도 이쯤 되면 ‘경지’지 싶다. 당초 50부작으로 시작했던 이 드라마는 60부, 75부, 최종적으로 81부작까지 3차례나 연장을 거듭하고 있다. 매회 비슷한 갈등 구조에 별 것 아닌 내용을 긴 장면으로 끌다보니 심지어 대사까지 동어반복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방송가에선 여전히 연장방송과 조기종영의 비극이 일어난다. <하늘이시여>와 시청률 1,2위를 다투는 한국방송 일일 연속극 <별난 여자 별난 남자>도 이미 20회 연장이 결정됐다. 물론 연장이 아니더라도 동어반복의 혐의에서 피해갈 드라마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오늘 처음 보는 시청자와 꾸준한 애청자가 함께 만족할 수 있도록 작가들은 비슷한 갈등을 매번 새롭게 만드는 데 골머리를 썩인다. 그러나 <하늘이시여>의 동어반복은 ‘친절해보일까봐’ 마련된 선물이 아니다. 애초 설정부터 이 드라마의 동어반복은 예정된 운명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혈연에 따라 두편으로 나뉜 주인공들은 절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대립 관계이기 때문이다. 가령 자경이 왕모와 데이트 하는 사건 하나를 두고 계모 배득과 이모 미향네 가족들은 모여서 ‘자경이, 나쁜 것’이라며 공분하고, 친어머니 영선은 ‘불쌍한 우리 자경이’다. 사건이 달라져도 그들의 입장은 초지일관 변함없다. 변함없는 미움,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는 돌고 돈다. 둘째, 주인공들은 가족에 대한 욕망 외에는 다른 욕망이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연애 생각밖에 없고, 노인들은 짝지워줄 생각밖에 없다. 캐릭터가 밍숭맹숭한 대신 자질구레한 에피소드와 웃기는 제스추어, 과격한 험담, 싸움 구경에 서로 ‘잘근잘근 씹는’ 재미까지 얹어서 시청자들의 눈을 붙잡는다. 롤랑 바르트가 <신화론>에서 “동어반복은 합리적인 것을 살해한다”고 했던 말은 설마 2006년 <하늘이시여>에 대한 예언이었을까.

<하늘이시여> 제작진은 연장을 하더라도 드라마 후반부에는 “출생의 비밀로 이야기를 끄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과 갈등을 담은 전혀 다른 부분이 시작된다”고 밝히고 있다. 나또한 동어반복으로 부탁하자면, 연장 부분에서는 주인공들이 제발 이기적인 혈연에 갇혀 폐소 공포증을 느끼게 하지 말고 상식적인 세계로 나섰으면 하는 바램이다. 자경과 영선이 한국 드라마에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모범적인 고부상을 재현하는 모습은 보기엔 흐뭇하지만, 그건 판타지도, 이상도 아니다. 가족의 이상에 갇힌 병리학의 세계일 뿐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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