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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거짓으로 무엇을 지키려거든, 이들처럼

등록 2017-01-16 11:15수정 2017-01-16 22:31

[권여선의 인간발견]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노바미디어 제공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노바미디어 제공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가 재개봉 한다는 소식을 듣고 케이트 윈슬렛이 연기한, 자세가 곧고 팔뚝이 튼튼한 여성 한나가 떠올랐다. 그러자 어찌된 일인지 <춘희 막이>에서 허리가 반으로 착 접혀 ㄱ자로 걸어 다니던 춘희 할머니도 생각났다. 그들이 결사적으로 지켜내려 했던, 목이 메고 눈물이 핑 도는 그들 삶의 고유한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더 리더>의 한나와 마이클은 한때 사랑한 사이였다. 한나는 마이클이 책 읽어주는 걸 좋아한다. 어느 날 갑자기 한나가 종적을 감춤으로써 삼십대 여성과 십대 소년의 위험한 사랑은 끝나지만, 마이클이 책을 읽고 한나가 집중하여 듣던 장면의 고요한 아름다움은 잊을 수 없다. 세월이 흘러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재판을 참관하러 갔다가 전범으로 고발된 한나가 법정에 앉아있는 걸 본다. 한나는 위증을 하고 그로 인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오래 복역한다. 영화는 한나가 왜 이런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무엇’을 숨기려 했는지 마이클이 이해하고 공감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춘희 막이> 엣나인필름 제공
<춘희 막이> 엣나인필름 제공

<춘희 막이>는 본처인 막이 할머니와 씨받이로 들어온 춘희 할머니의 일상을 찍은 다큐영화이다. 범상치 않은 관계가 46년이나 이어져온 만큼, 그들 일상의 갈피에는 묘한 위계와 우정이 배어 있다. 막이 할머니의 가장 큰 걱정은 자기가 먼저 죽으면 돈 관념이 없는 춘희 할머니가 어찌 살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막이 할머니를 비롯해 그의 딸과 이웃까지 나서서 춘희 할머니에게 돈 세는 법을 가르치려 하지만 그는 끝내 숫자 세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배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아 영화를 보는 관객마저 복장 터지게 만드는데, 나중에 춘희 할머니가 아궁이에서 군고구마를 꺼내며 그 개수를 척척 세는 걸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관객은 뒤늦게야 춘희 할머니의 어눌한 말을 통해 그가 왜 하늘같은 막이 할머니의 간절한 요구를 저버리고 돈을 못 세는 척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한나와 춘희가 거짓으로까지 지켜내려 한 것은 무엇이었나. 그들의 거짓이 결코 세간의 처벌이나 공격을 모면하기 위한 얕은 수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오히려 가중된 처벌과 가슴 아픈 공격을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생을 걸면서까지 끝내 ‘무엇’ 하나만을 지켜내려 안간힘을 썼다는 게 맞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소외된 하층계급 여성들이 보여준 단단한 존엄과 신의에 대한 존중이 더욱 쓰라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요즘 청문회와 헌재에서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고 살아온 자들이 앵무새처럼 뻔뻔한 위증과 변명만을 되풀이하는 현실이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들이 거짓으로 지키려는 것의 비루한 실체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 이 대목에서 감정을 누르고 공평해져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무덤에 갈 때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 있고 그걸 지킬 권리가 있다. 그게 비루한지 고귀한지는 아무도 섣불리 결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어떻게’ 지킬 것인가이다. ‘무엇’을 지키되 거짓으로밖에 지킬 수 없다면, 한나와 춘희처럼 자기 생의 가장 소중하고 치명적인 것을 거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무릅쓴 삶의 무게가 지키려는 것의 윤리적 가치를 입증한다. 이리하여 ‘어떻게’와 ‘무엇’은 한 몸이 되니, 소설가로서 저들의 삶을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가 생겼다.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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