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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달빛 아래서 흑인들은 바다처럼 푸르다

등록 2017-03-27 11:37수정 2017-03-27 20:06

[권여선의 인간발견] <문라이트>가 그린 천국의 풍경

<문라이트>. 오드 제공
<문라이트>. 오드 제공

아빠는 없고 엄마는 마약쟁이인 흑인 소년이 친구들에게 호모라고 놀림과 괴롭힘을 당한다. 이 불우한 소년이 자라서 마약판매상이 된다는 이야기, 이 진부한 현실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라이트>는 무엇을 했다. 이 영화는 시이며 음악이며 흔들리는 빛으로 그린 이야기이다.

소년의 성장기는 총 3부, 리틀-샤이란-블랙으로 구성된다. 1부에서 작고 까만 리틀은 친구들에게 쫓기다 우연히 숨어든 곳에서 마약판매상 후안을 만난다. 후안은 테레사라는 아름다운 애인을 가진 건장한 흑인 남자이다. 호의를 가진 후안이 말을 걸지만 리틀은 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닷가에서 후안이 리틀을 가볍게 안아 아기 목욕 시키듯 바다에 띄워 수영을 가르쳐준 후 리틀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후안도 어렸을 때는 리틀처럼 작았다든가, 후안의 할머니가 달빛 아래에서 흑인은 푸르게 보인다고 했다는 말 같은 것. 그러면서 리틀의 말문이 트인다. 마침내 리틀이 후안에게 가장 힘겨운 질문을 하고 또 후안이 힘겨운 대답을 할 때, 둘의 우정과 사랑은 눈물겹게 꽃핀다.

2부에서 리틀은 어깨가 살짝 굽고 밥을 먹을 때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발을 힘없이 내디뎌 묘한 불균형을 자아내는 걸음을 걷는 비쩍 마른 소년 샤이란이 되었다. 어찌된 일인지 후안은 죽고 없다. 샤이란은 갈 곳이 없는데, 집에는 마약중독이 극에 달한 엄마가 있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테레사를 찾아가는 것은 나쁜 소문의 근원이 된다. 어두운 바닷가에서 후안과의 추억이 어린 바다를 바라보는 샤이란의 눈은 그야말로 커다란 눈물방울 같다. 그때 유일한 친구인 케빈이 다가와 둘은 마리화나를 나눠 피우며 슬픔과 눈물에 대해 얘기한다.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배경으로 그들은 행복을 나눈다.

리틀-샤이란의 자연스런 연속성에 비해 3부의 블랙은 낯설다. 거대한 덩치와 번쩍이는 치아를 가진 블랙은 후안처럼 마약판매상이 되어 있다. 그는 옛친구 케빈을 찾아가는데 케빈도 블랙만큼이나 낯설다. 이러한 관객의 이질감은 그들 관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둘은 어색하게 술을 마시며 어긋난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나 블랙이 케빈의 집 앞에서 야자수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밤바다의 검푸른 물결을 바라볼 때, 문간에 기대어 케빈에게 머뭇거리며 고백할 때, 케빈에게 머리를 기대고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그의 금속 치아와 근육 갑옷이 실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라 처절한 생존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알게 된다. 시적인 ‘에피파니’라고 할까, 철갑을 두른 블랙의 고요한 표정 위로 불안과 갈망을 품은 리틀과 샤이란의 얼굴이 조심스럽게 현현한다.

환한 오후와 저녁의 바다, 캄캄한 밤바다에 이르기까지 <문라이트>에서 바다는 행복의 메타포이다. 그리고 바다와 달빛을 매개하는 고리는 흑인이다. 달빛 아래에서 흑인은 푸르게 보인다고 후안은 말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제제에게 뽀르뚜가가 있다면 리틀에게는 후안이 있다. 내게 리틀과 제제는 같은 아이들이다. 행복의 양은 적고 고통의 양은 많은 아이들, 가장 약하고 가난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가치를 안다. 그건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학대받지 않고 평등하게 대접받는 것과 사랑하고 사랑받을 권리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말문을 여는 자가 천사이며 그들이 웃는 곳이 천국이다.

권여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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