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연애담>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이현주 감독의 <연애담>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주인공 1번 윤주가 주인공 2번 지수의 집에서 처음으로 밤을 보내는 부분이었다. 같은 침대에 누운 지수는 윤주를 애무하고 키스하기 시작하지만 겁에 질린 윤주는 움찔한다. 여기서 한국 영화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지수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윤주의 거부를 받아들이고 물러난다. 한참 에로틱한 분위기가 무르익기 시작했는데, 한쪽이 주저했다고 거기서 그냥 끝내버린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영화에 섹스신을 담으려는 사람이라면 일단 이 영화를 보아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적어도 이 장면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종종 무시하는 기초적인 섹스의 윤리학을 교과서처럼 간결하고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지금도 이를 대체할 만한 예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랬으니, 지난주에 터진 이현주에 대한 끔찍한 뉴스를 접했을 때 등에 칼을 맞은 기분이 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창작자의 삶이, 그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기능했던 영화의 교훈을 더럽힌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장면을 온전하게 떠올릴 수가 없다. 나는 한동안 그 장면을 찍을 때 감독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돌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굳이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영화 <연애담>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예술작품은 창작자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분리될 수 있을까? 분명한 선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있다고 해도 그 선이 언제까지 한자리에 머물러 있을 거 같지도 않다. 예를 들어 나에게 카를로 제수알도가 아내와 아내의 정부를 살해한 살인자라는 사실은 그의 음악을 듣는 데에 그렇게까지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와 공간이 우리와 가까워질수록 이런 거리두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예술과 창작자를 분리해야 할 것이다. 이는 창작자가 아무리 끔찍한 인간이라고 해도 우리가 그의 창작품에 접근할 길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여서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예술과 창작자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은 창작자에게 어떤 성역도 없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놀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을 헛갈린다. 우린 몇십년의 업적을 쌓은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특정 예술가를 특별대우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그 예술가는 한 명의 시민으로서 자기 책임을 지면 그만이고 우린 그의 작품을 검열하지 않으면 된다. 후대 사람들이 그 사람이 저지른 불쾌한 잘못 때문에 그 창작품을 더 이상 소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왜 그런 걸 신경 쓰는가. 시대를 넘어서는 고전을 만드는 건 후대의 선택이다. 우리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더 많은 피해자들의 폭로를 접하게 될 것이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왜 난 여기에 확신이 안 들까. 왜 난 수많은 업계 사람들이 실명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연애담>의 감독처럼 확실하게 경력이 끊길 거라고 믿을 수가 없는 걸까? 칼럼니스트
※ ‘듀나의 영화 불평’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