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희의 ‘놀람과 빡침’
-나는 왜 기주봉을 인터뷰하고도 기사를 쓰지 못했나-
-나는 왜 기주봉을 인터뷰하고도 기사를 쓰지 못했나-
배우 기주봉. 그를 인터뷰하려고 10개월째 벼르는 중이었다. 지난해 겨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라는 독특한 독립영화의 주연을 맡아 찰리 채플린을 연상시키는 인상적 연기를 펼친 그를 찜꽁 해두고 홍보사와 제작사와 감독까지 졸라댔다.(그는 이 작품으로 올해 4월 들꽃영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스케줄이 바쁜 데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라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올여름 <공작>을 보고는 더 몸이 달았다. 6시간 넘는 특수분장 끝에 완벽한 김정일로 재탄생한 기주봉은 화제의 중심에 섰다. 꼭 인터뷰하고 말리라. 또다시 조르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 “사정이 있어서…”였다. 그 후 일주일 만에 스위스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기주봉이 배우생활 40여년 만에 <강변호텔>(감독 홍상수)로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이다. 기회가 왔다 싶어 다시 졸랐다.
역시 끈질김엔 장사가 없는 법. 어렵게 지난 22일 인터뷰가 성사됐다. 한 시간 남짓 배우 기주봉을 만났다. 서라벌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배우의 꿈, 지방을 전전하며 연극을 하던 시절 가난의 굴레, 생계를 위해 정수기 외판원을 했던 경험, 아직까지 월셋집을 전전하고 있다는 솔직한 고백까지…. 그러면서도 그는 연기에 대한 욕심과 열정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언젠가 세계 최고 배우로 우뚝 서리라”는 꿈이 이번 로카르노영화제 수상으로 이뤄진 듯하다며 상기된 표정을 짓는 그는 문자 그대로 ‘천생 배우’였다. 120편 넘는 영화에 출연한 베테랑 연기자인 그는 <공작>의 김정일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외모가 김정일과 닮았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건 특수분장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 김정일 동영상을 많이 봤지만 그저 흉내를 내고 싶진 않았다. 중요한 것은 북한 절대 권력자로서 그의 카리스마와 파워, 태도에서 엿보이는 자신감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일이었다”고. “김정일 분장을 뚫고 나오는 기주봉만의 에너지가 보였다”는 한 동료의 평가에 “해냈다”는 희열을 느꼈다고도 했다. 그 작은 체구에서 내뿜는 압도적인 힘에 매료됐고, 머릿속에 기사의 구성이 짜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문제는 인터뷰를 마치고 그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을 때 시작됐다. 편하게 물었다. “그런데, 작년 그 대마초 건은 어찌 됐나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수차례 인터뷰를 거절한 것이 바로 지난해 벌어진 대마초 사건 때문이었음을…. 이런 경우, 대개 자숙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인터뷰를 하지 않지만, 아직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폭발적인 연기력에 반한 터라 인터뷰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판결이 내일 나요. 벌금형이나 집행유예가 떨어질 것 같은데….”
헐;;;; 뭐라고? 판결이 내일이라고? 순간 귀를 의심했다. ‘아, ×됐다!’ 마음속에서 절망의 비속어가 방언처럼 터졌다.
‘왜 지금까지 판결이 내일이라는 걸 말하지 않은 거지? 아니, 난 왜 미리 판결이 언제냐고 묻지 않은 거지?’(그는 인터뷰 도중 대마 사건으로 소속사에서도 나오고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홍보사도, 제작사도, 투자배급사도 판결이 다음 날이란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거다. 그렇다고 기주봉이 그 사실을 숨긴 것도 아니다. 숨길 거면 왜 인터뷰가 끝난 뒤 순진하게 “판결은 내일”이라고 말했겠는가. 혹시라도 대마 사건 때문에 <공작>에 피해가 갈까 노심초사했다는 그다.
회사에 보고했다. 카톡(카카오톡) 회의가 열렸다. 데스크(팀장·부장)도 의견이 갈렸다.
?
카톡방 난상토론 끝에 결론은 “잠정 보류”로 모아졌다. 근데 대체할 기사는 어떻게 급조하지? 당장 내일 출고해야 할 기사가 펑크가 났으니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나자 죄책감에 휩싸였다. 누구를 향한 죄책감인지 분명치 않았다. 시간을 내어 준 기주봉 배우한테도, 기사가 펑크 나 발을 구르게 된 데스크에도, 인터뷰를 잡아준 홍보사와 배급사에도 죄를 지은 느낌이었다. 기주봉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면 차라리 원망하고 화라도 냈을 텐데.
주섬주섬 노트북을 챙겨 일어서려는 찰나, 홍보담당자가 조심스레 말을 전했다. “기주봉 배우님이 고생하셨는데 저녁이라도 함께 하자시네요. 아까 인터뷰하며 기자님이 온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 와중에 밥이 넘어갈 리 없는 기주봉이건만, 이 양반은 되레 기자 걱정을 하고 있었다.
몇 번의 고사 끝에 결국 8000원짜리 고기덮밥 한 그릇씩을 놓고 “날씨가 아직도 덥네”, “내일 태풍이 온다던데”하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눴다. 몇 술 뜨지 못한 고기덮밥은 식어갔다. 헤어질 때, 그는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또 뵈어요. 오늘 고생시켜 미안해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급체했고, 택시기사에게 “토할 것 같으니 아무 데나 내려달라”고 호소해야 했다. 기주봉의 해맑은 미소가 내내 밟혔다.
다음날인 23일 오전, 기사가 우르르 떴다.
‘대마초 흡연’ 배우 기주봉 1심 집행유예…“범행 인정, 반성” , ‘대마초 흡연 혐의' 기주봉, 1심 집행유예 “범행 인정 고려”
나는 그가 왜 대마초를 피웠는지 모른다. 뼛속 깊이 반성하는지 판단하는 것도 내 몫은 아니다. ‘그러게 평소에 행실을 똑바로 하지 그랬냐’는 주제넘은 참견도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취미조차 깊이 빠지면 연기에 방해될까 싶어 가지지 않고” 40년 넘게 한우물만 파 온 배우 기주봉이, 60살이 넘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그의 연기력이, 이 사건으로 묻히지 않기를 팬의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바랄 뿐이다.
**사족: 무려 원고지 43.7매에 달하는 인터뷰 전문은 내 노트북 안에 잠들어 있다. 나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주봉 인터뷰를 읽고 싶어하는 독자가 있지 않을까? ㅠ.ㅠ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공작’에서 열연한 배우 기주봉을 22일 오후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모든 카톡 창 내용은 팀원들 사이의 대화를 재구성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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