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리뷰 - 창작뮤지컬 ‘빨래’

등록 2006-03-08 17:42

삶의 ‘찌든 때’ 하얗게 지워버리고…
관객과 무릎 대고 시대고민…소극장 뮤지컬 방향 제시

뮤지컬의 제작방식이 다양해지고 있다. 대형 공연장을 찾아야만 볼 수 있던 뮤지컬을 이제 대학로의 소극장 골목에서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대형마트에 해당하는 뮤지컬 산업이 영세한 구멍가게 수입까지 노리고 있는 것인가? 값비싼 관람료, 에로틱한 육체와 역동적인 군무, 화려한 의상과 노래, 쏟아붓듯 분출하는 박과 리듬 그리고 다소 감상적인 슬픔…. 뮤지컬장르에 대해 매혹과 거부감을 동시에 느끼며 공연장을 찾기를 망설여온 관객에게까지 뮤지컬은 지금 자세를 낮추고, 당신 가까이 어디서나 뮤지컬이 있다고 부드럽게 관람을 권유하고 있다. 이것은 장르의 진화일까? 전면적인 시장 지배를 노리는 탐욕일까?

뮤지컬을 창작할 수 있는 인력의 성장과 기성의 제작 관행을 넘어서는 젊은 창작집단의 의욕과 재능에 힘입어 어떤 뮤지컬은 자본주의 흥행 산업의 대표주자 지위 너머 다른 꿈을 꾸고 있다. 뮤지컬이 불러일으키는 해방과 자유의 기운이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고, 올바른 공동체를 실현하는 원동력으로 쓰이기를 말이다. 관객과 무릎을 맞대고서 동시대를 사는 문제의식을 나누며, 일과 놀이가 분리된 현실 속에서 우리들의 풀죽은 신과 흥을 되살리는 꿈을 꾸는 중인 것이다. 창작뮤지컬 <빨래>(추민주 작·연출)가 소극장용 뮤지컬이 나아가야 할 한 방향을 지시하는 깜박이를 막 켰다.

<빨래>는 ‘국제수퍼’라는 아이로니컬한 간판을 내걸고 있는 서울 변두리 달동네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그늘에서도 민들레 꽃은 피고, 한국 여자와 몽골 남자는 연인이 되어, 맞잡은 손으로 빈주머니를 채운다. 뒷골목 낡은 풍경과 대형서점의 쾌적한 매장을 이동식 세트로 교차하는 활달한 공간 변용이 신선하고, 일인다역 행인들을 등장시켜 시공간의 리얼리티를 섬세하게 세공해나가는 연출력이 눈에 띈다. 관객의 상상력과 놀이성을 적극 가동시키는 연극의 유희정신과 진지한 메시지가 잘 버무려지고 뮤지컬이 제공하는 위안과 판타지, 그리고 동시대를 사는 현실감이 건강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기획, 작가, 연출가, 작곡가, 작업에 참여한 배우 등 창작주체들은 이 연극을 적어도 ‘흰 잉크’로 썼다. “여성 안에는 언제나 최소한 약간의 좋은 모유가 남아 있다. 여성은 흰 잉크로 글을 쓴다.”(엘렌 식수)

연극은 비정규직 근로자, 여성 노동자의 고용조건과 부당해고, 외국인 노동자 등 서울살이 드난살이에 시달리는 유민들과 비주류의 삶을 섬세하고 역동적으로 조망한다. 이 연극은 부권적 질서와 자본주의의 욕망이 활개치는 ‘못된 서울’에서 골목이 빈자의 방을 품듯 약하고 병든 것들을 따뜻이 품는다. ‘엿같은! 엿같은!’ 욕마저 리듬을 입혀 약자에게는 현실의 모순과 장벽을 씩씩하게 헤쳐가게 하고, 가부장제 아래 희생양이기만 했던 여성에게는 흔연히 ‘더 많이 사랑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라고 등 두드린다. 극장엔 뮤지컬이 주는 일시적인 위안과 해방감을 넘어 삶의 얼룩을 다시 하얗게 돌려놓는 회복의 춤사위와 치유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빨래>는 무엇보다 여성적인 것이 삶의 주체가 되어 ‘사람노릇’하는 세상의 도래를 당기는 응원의 깃발로 펄럭이는 것이다. 4월23일까지 대학로 상명아트홀 1관.

장성희/극작가·연극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