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은 자신의 이익만 챙기느라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존재는 지구상에 인간과 바이러스뿐이라며 인간은 포유류가 아니라 바이러스라고 말한다. 근대사회 이후 이기심이 우리가 사는 거대하고 복잡한 사회에 어울리는 감정이라는 교리가 확고하게 자리잡혔다. <한겨레> 자료사진
▶ 우리들은 왜 협력하지 못할까? 모두가 이기적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우리는 각자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 사회 전체적으론 오히려 바람직하다는 교리를 받아들이곤 한다. 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도 협조적인 태도를 지녔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협력이 잘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우리 안의 이타적 유전자를 일깨우는 길은 무엇일까?
경제학에 실험 연구가 도입되기 시작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0~40년 전 얘기다. 마웰과 에임스라는 두 명의 사회학자가 ‘공공재 게임’이라 불리는 일종의 행동 실험을 실시했다. 서로의 이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아볼 수 있도록 설계된 게임이다. 두 학자가 실험을 통해 확인한 사실은 이랬다. 대부분의 실험 참가자들이 자신에게 최대의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는 대신,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이익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한다는 것.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변형시켜 실험을 반복해 보니, 처음 확인했던 행동 패턴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러던 중 두 연구자는 경제학 전공자들로만 구성된 집단을 대상으로 같은 실험을 진행해 봤다. 그랬더니 경제학 전공자들은 이전 실험 참가자들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경제학 전공자들은 실험 시작부터 종료 때까지 거의 일관되게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행동했는데, 두 연구자는 이들에게서는 특이하게도(!) 공정하다든가 따위의 관념을 찾아볼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두 연구자는 실험 결과를 담은 논문 제목을 ‘경제학자들은 무임승차를 한다. 이들 말고도 또 그런 사람들이 있나?’라고 정했다. 이후 경제학 전공자들의 무임승차 문제는 거의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유독 경제학 전공자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놓고, “배우는 게 그래서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원래 그런 사람들이 경제학을 선택해서 그렇다”는 주장도 나왔다. 나 역시도 경제학 전공자들만을 따로 모아서 실험을 진행해 본 적이 있는데, 이들에게선 타인을 위한 행동, 즉 협조율이 현저히 낮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웃의 캠페인 참여율 알려줬더니…
그런데 실험 데이터들을 살펴보다가 흥미로운 대목 하나를 찾아냈다. 다른 전공자들과 섞여서 실험을 할 때와 자기들끼리만 따로 모아 실험을 진행했을 때, 경제학 전공자들이 전혀 다른 행동 패턴을 보였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경제학 전공자들의 경우 다른 이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극히 낮은 협조율을 보였으나, 일단 다른 이들보다 자신의 협조율이 낮다는 점을 확인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만큼 협조율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행동했다. 즉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무임승차를 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짜인 실험 상황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협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경제학 전공자들 역시 타인의 협조에 무임승차해 이익을 취하기보다는 타인의 협조에 협조로 대응했다.
경제학 전공자들한테서 발견되는 특징은 다른 참가자들에 비해 타인들이 협조할 것이라는 데 대해 지극히 낮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협조를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쳐오면 자신도 타인에게 협조를 할 생각을 접어버리는 것, 아마도 이게 경제학 전공자들이 보인 이기적 행동의 원인으로 보인다. 경제학 전공자들만 따로 모인 집단에서 진행된 실험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차례로 일어났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할 것이란 생각에 자신도 이기적인 태도로 실험에 임한다. 이런 기대는 실제 결과로 나타나고, 스스로의 기대가 맞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기대는 자기강화 과정을 낳아 결과적으로 협조율은 계속 낮게 유지된다.
자, 다른 전공자들과 함께 참가한 실험에선 어땠을까. 이번엔 경제학 전공자들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협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게다. 타인의 협조가 확인되는 순간, 다시 말해 자신의 기대가 잘못되었음을 확인하는 순간, 경제학 전공자들도 다른 사람만큼 협조 수준을 높인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복잡다단하고, 우리는 숱한 딜레마 상황에 맞닥뜨린다. 딜레마 상황에서 협력에 실패하는 이유는 뭘까? 물론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협력 의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 위 사례가 시사하는 바가 바로 이 경우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다른 사람들도 협력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회의 협력 수준을 높일 수 있다. 구체적 사례는 여럿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마코스에서는 에너지 절약 캠페인의 일환으로 요금 고지서에 77%의 이웃들이 이미 에너지 절약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더니, 전기 사용량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상대로 취약계층 학생 지원 프로그램에 금전적 기부를 요청했을 때 다른 학생들의 기부 현황 정보를 알려주는지 여부가 기부 참여율에 유의미한 영향을 줬다.
물론 저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결과적으로 모든 이들이 이익을 보는 경우도 많다. 잘 짜인 규칙 아래 진행되는 스포츠 경기, 특히 기록경기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결과도 좋으리라 기대한다. 시장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이미지를 갖곤 한다.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때 사회적으로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 말이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모든 영역이 이처럼 돌아가지는 않는다. 저마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 결과적으로 모든 이들의 이익이 가장 낮아지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환경 문제가 그렇고, 공공장소를 쾌적하게 유지하는 문제가 그렇다.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사회적 딜레마 상황이라고 부른다.
이기적이라 전제하고 정책 짜라?
사회적 딜레마 상황의 탈출구는 자신에게 손해가 돌아가더라도 협력적인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만은 아니기에, 딜레마로부터의 탈출이 가능하기는 한 건지 의심이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회를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할 때,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도덕적 감정에 의존해 상황의 개선을 기대한다는 건 너무 순진한 바람일 수도 있다. 물질적 이익 앞에서 도덕은 비참하리만큼 변덕스럽고 위약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실험실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비춰 봤을 때, 사람들은 물질적 이익의 유혹 속에서도 꾸준히 도덕적인 행동을 하고(물론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이익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타인 혹은 집단의 이익을 고려해 행동한다.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이타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다른 사람들의 협조적 성향을 기대할 수 있다면 혹은 실제 협조적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이에 동조할 의향도 갖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수백년 전, 사람들은 도덕적이므로 올바른 방향만 제시한다면 이를 잘 따를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경계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같은 사상가는 사람들이란 사악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쉽게 대의를 저버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바로 이 점을 잊었다가는 큰코다친다는 경고를 통치자들에게 보낸 바 있다. 데이비드 흄은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적어도 정책을 구상할 때는 그 정책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이에 반응하게 될 사람들이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전제하고 정책을 짜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도덕으로 충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정책을 짰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면 낭패를 보겠지만, 반대로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전제한 뒤 만들어진 정책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일부) 있는 경우에도 문제없이 잘 작동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렇게 ‘일단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는 존재라고 생각하자. 그게 안전하고 적절한 출발점이다’라는 믿음이 점점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러다 보니, 언젠가부터 이기심이란 우리가 사는 거대하고 복잡한 사회에 어울리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다. 크고 복잡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서로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필요를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충족시키고 서로에 의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물건 대부분은 우리를 잘 아는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한 번도 마주칠 일 없는 저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만든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만든 생산물이 어떻게 내 손에 도착해서 내 필요를 충족시키게 되는 걸까? 애덤 스미스 이래로 많은 사상가들은 이를 가능케 만들어주는 시장의 힘에 주목했다. 이들에 따르면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의 대규모 협력은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을 위해서 행동했기에 작동하며, 그 결과 사람들이 자신들이 아는 누군가를 위해서 생산을 했더라면 달성할 수 있었던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생산하게 됐고, 사회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시장이라는 메커니즘은 우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누군가를 넘어서 생면부지의 누군가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만들고, 자신의 이익만을 보면서 행동하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복지를 증진시켜주는 대규모 협력체계를 가능케 하는 인류의 성과물이었다.
“시장을 통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근대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둘러싼 하나의 커다란 교리가 성립했다. 이 교리엔 매력적인 측면도 있었다. 이 교리에 따르면 시장이 잘 작동할 경우,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의 일에만 신경 쓰고 적절한 방식으로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되고, 시장은 사람들의 이타성 혹은 도덕적 심성(그 대상 범위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만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었을 수준으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켜줌으로써 대규모 협력을 가능케 한다. 이 교리의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리고 이 교리는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사람들을 매개해주는 유일한 메커니즘은 시장뿐이다. 세상을 시장을 통해 조직해야만 발전할 수 있다”는 식으로 탈바꿈해 우리를 사로잡았다.
시장이 서로 모르는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면서 대규모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시장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해내지는 못하며, 시장을 통해 서로의 필요가 충족되기 위해서라도 도덕적 행동이 필요할 때가 있다. 시장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매개해서는 안 되는 영역도 존재하고(장기 이식이나 성을 사고파는 것 혹은 누가 군대를 가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 시장을 통하는 게 더 비효율적인 경우도 있으며(약속 이행의 도덕적 의무를 벌금으로 대체하거나 헌혈을 시장에 맡기는 것), 표면상으로는 시장계약인 것 같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계약될 수 없는 사안들이 다수 포함돼 있는 경우도 있다(노동계약에서 노동시간과 달리 노동 강도는 계약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사람들은 시장을 매개로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따라서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중요해진다.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피해를 줄 때 그 행동을 스스로 규제하려 하고(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다소간 희생해야 하더라도!), 금전적 유인이 제공되지 않더라도 상호 협력이 필요한 경우 기꺼이 참여하는 것이 필요한데, 사람들이 그리 행동할 가능성은 생각만큼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최정규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시장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해내지는 못할 뿐 아니라, 도덕적 행동이 반드시 필요할 때도 많다. 사진은 한 기업의 헌혈 행사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