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08 05:00
수정 : 2019.03.11 13:50
부장급 여성 21명의 목소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심층면접
30대그룹 여성임원 겨우 3%
극소수 여성임원마저 외부채용
승진 하려면 “자녀양육계획 내라”
기업 다양성 확보 노력 부족
“여성임원 늘면 기업성과 좋다”
“‘아니 무슨 여자애 나이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30대가 부장이야?’ 그래서 (부장 승진) 1년 누락됐었거든요.”(ㄱ씨)
“차장에서 부장 될 때 ‘너 이제 막 진급했으니까 아기 갖는 거 1년 정도 미뤘으면 좋겠다’고 직접 얘기를 들었어요.”(ㄴ씨)
ㄱ씨는 600여명 규모의 제조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했다. 여성 직원 비율은 23%지만, 여성 임원은 딱 1명(6%)이다. 석사 학위가 있는 ㄴ씨는 직원 10명 중 4명이 여성인 건축회사에서 설계일을 한다. 여성 임원은 한 명도 없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최근 ‘기업 내 여성 임원 비율 확대를 위한 전략 연구’ 보고서(연구자: 강민정·문지선·권소영·김양희·방세린)를 펴내며 부장급 여성 21명(차장 2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상당수는 자녀가 있어 승진에서 제외됐고, 비혼이라 입길에 올랐다. 남성 중심 문화를 거부하면 열정을 의심받았고, 받아들이면 소문에 휘말렸다. <한겨레>는 ‘여성의 날’을 앞둔 7일 임원 후보군인 여성의 눈으로 기업을 덮고 있는 ‘유리천장’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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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천장’, 노력으로는 안 깨진다 “여성이 (임원으로) 뚫고 가는 경우가 딱 한 명이었는데 (그 여성을) 낙하산으로 데려오고 그분이 또 다른 사람들을 데려오는 패키지 시스템이라서….”
ㄷ씨 아이티(IT) 회사에서 여성 임원은 2명이다. 그나마 1명은 외부에서 영입됐다. 외부 수혈된 전문경영인이 데려오는 ‘패키지 시스템’도 많다고 한다. 일회성 승진은 내부 승진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고, 여성 임원을 ‘외부자’에 머물도록 만든다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형·동생’ 호칭 등 남성 중심적 조직문화는 여성의 내부 승진을 제약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혔다. 박사학위를 가진 ㄹ씨는 뒤처지지 않으려고 “담배 연기 다 맡고, 2차·3차까지 회식 자리 쫓아다녔”지만, ‘차라리 결혼을 해라’라는 말을 들었다. ㄹ씨는 임원 후보이기 전에, ‘어린 미혼’ 여성이었다.
남성 문화를 거부하는 여성도 어려움을 겪는다. 금융회사 마케팅 담당인 ㅁ씨는 술·담배를 안 하고 골프도 안 친다. 실력으로 경쟁하겠다는 결단이었지만, ‘안 치고 (잘도) 하겠다’는 말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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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한테만 묻는 ‘자녀양육계획’ ㅂ씨가 다니는 자동차회사는 국외 주재원 경험이 승진 ‘필수 코스’다. 그런데 여성 지원자는 서류를 하나 더 내야 한다. ‘자녀 양육 계획서’다.
“5년치 계획을, 어떻게 애를 누가 ‘케어’할 건지에 대한 기획서를 내서 일에 지장이 없다고 판단이 되면 보내주겠다는 거고. 그쪽에서 ‘여자 주재원 받겠다’ 해야 가는 건데 ‘(여자는) 아무도 의전을 못 한다’고 보죠.”
돌봄 노동은 여성이 해야 하고, 일과 병행하기 어렵다는 시각이 여성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가로막는다. 회사 고위직에 대한 ‘의전’이 필수 업무라는 전근대적 의식도 결부돼 있다. 이런 상황에선 여성 관리자도 본래 업무와 무관한 영역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서는 짚었다.
“(여성 팀장이 있는) 조직은 새로 만든 조직이에요. 여자는 승진하면 새로 만든 조직, 듣도 보도 못한 조직이 생겨요.”(화학회사 ㅅ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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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도, 따라할 ‘꼴’도 여성에겐 없다 일과 삶의 균형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늘고 청탁금지법이 시행된 덕분에, 경직된 조직문화는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다. 다만 여성들은 여전히 남성 중심 네트워크가 리더십 평가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느끼고 있었다. ‘롤 모델’로 삼을 여성 임원이 극소수이고 그마저도 상당수가 외부 출신이라 네트워킹이 어려운 점도 큰 고충이다. ‘젠더 다양성’ 확보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여성 임원 발굴·육성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회사는 한국에 거의 없다. 그나마 있는 프로그램도 ‘보여주기’에 그치고 지속되지도 않았다.
“여성 임원은 절대 기획되고 준비되지 않아요. 임원 뽑으려면 기획하고 임원 풀을 육성하거든요. 육성 프로그램이 다 있지만, 현재 임원이나 사업부장이 석세서(후임자)를 찍는 식이에요. 어떤 남자도 여자를 석세서로 찍지 않아요.”(ㅅ씨)
보고서가 국내 30대 그룹 277개 회사 임직원 현황을 살펴본 결과 여성 임원 비중은 평균 3.0%, 여성 임원이 없는 기업은 66.1%였다. 여성 임원 가운데 경력 비중은 49.0%로 내부 승진(39.6%)보다 많았다. 내부 승진을 한 남성 임원(53.2%)이 경력 출신 임원(33.7%)보다 크게 많은 것과 대조된다.
그러나 여성 임원의 존재는 기업에도 ‘득’이 된다. 보고서를 보면, 여성 임원이 있는 기업은 없는 기업보다 영업이익이 1.7배 높았고, 여성 임원 수가 4.6명을 넘어서면 영업이익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강민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경영진에 포진한 남성 임원들이 남성 후배를 이끌어주면서 젠더 불균형이 강화되는 측면이 있다”며 “기업은 여성 임원 ‘풀’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육아휴직 보장 등으로 부장급 여성 인력을 강화하려 노력했는지 되물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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