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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빈민촌 ‘맨손’ 구조…‘살기위해’ 약탈도

등록 2010-01-18 07:37수정 2010-01-18 10:05

권태호 특파원
권태호 특파원
[아이티 지진참사] 권태호 특파원, 포르토프랭스를 가다
지진 덮친 카르푸르 해직녘까지 벽돌 걷어내
슈퍼서 빼온 물건 서로 차지하려 주먹다짐
“물·식량 좀…” 애타는 호소
아이티 국경을 넘었다. 시계를 보니 16일 오후 3시20분(현지시각, 한국시각 17일 오전 4시20분)이다.

오전 7시50분 도미니카 수도인 산토도밍고에서 국제구호개발단체인 굿네이버스 회원들 등과 함께 미니밴 한 대를 빌려타고 무작정 국경을 향해 출발한 지 7시간20분만이었다. 얼마를 서성거렸을까. 우연히(하지만 우리에겐 ‘기적처럼’) 도미니카의 한국인 교포가 운영하는 발전회사 이에스디(ESD) 직원을 만나 아이티 현지인이 운전하는 지프차량으로 옮겨탔다. 국경검문소는 있지만, 아무런 검문이나 출입국 절차도 없었다.  


운전을 하던 존 베이클은 도미니카가 15일부터 국경을 완전개방했다고 전했다. 다만 매일 밤 7시 국경은 폐쇄됐다가 다음날 아침 8시 다시 개방된다. 긴급의료센터가 설치된 도미니카의 국경도시 히마니까지 엠블런스가 계속 환자들을 실어날랐다. 국경지대의 검문소 부근에는 도미니카에서 아이티로 물자를 건네주려는 차량들과 이 물품들을 건네받는 아이티 차량들과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다만 아이티 사람이 도미니카로 넘어오는 것은 통제하고 있다.

다시 수도 포르토프랭스까지는 2시간이 넘는 길이었다.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차창밖 비포장 도로 위에선 하염없이 동쪽으로 걸어가는 아이티인들을 마주쳤다. 픽업트럭을 개조한 시내버스, 큰 트럭을 개조해 만든 시외버스에는 사람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어딘가로 어딘가로 향했다. 옷가지 같은 가방만 든 채 맨발의 사람들도 보였다.

여진의 공포로 집에 들어가진 못해 거리에서 밤을 새우고, 악화된 치안에 불안해진 이들은 친척이라도 있는 시골을 찾아 무조건 포르토프랭스 주변을 떠나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아 포르토프랭스와 주변 도시로 왔던 이들도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 근처 10개 도시에 지진 피해가 있었는데, 이중 3곳은 도시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아이티인들은 전했다. 포르토프랭스까지 운전을 하던 존에게 ‘총소리를 들었느냐’라고 물어보니, “밤이 되면 당신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며 “감옥이 무너져 4000명의 범죄자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그들은 약탈하고, 서로를 죽이고 있다”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이티 주민들이 16일 트럭에 빽빽이 탄 채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사진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아이티 주민들이 16일 트럭에 빽빽이 탄 채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사진 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짐을 빈 회사 사택에 풀어놓고, 포르토프랭스 중심가로 향했다. 대로변의 잘 지어진 건물은 피해가 적었지만, 한 블록 안쪽 빈민촌에서는 철근없이 블록벽돌로만 지어진 집들은 지진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곳은 도로가 좁아 중장비가 들어갈 수도 없고, 중장비가 넉넉지도 않아 건물 더미에 깔린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주민들이 울면서 맨손으로 벽돌을 걷어내고 있었다.


아이티 주민들에 따르면, 이틀 전까지만 해도 시체가 길거리에 널려있었다고 한다. 조니 마누에(34)는 “시체가 길거리에 개가 죽은 것처럼 널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옆을 무심히 지나갔다. 아이티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했다. 지진 피해가 큰데다 원래 최극빈민층 지역인 카르푸르에서는 무너진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꺼내 가져가고, 이곳을 지나는 경찰도 이런 약탈을 제지할 생각도 않는다. 술을 마신 사람들은 눈이 붉게 충혈돼 있고, 작은 물품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주먹다짐을 하고 있다. 포르토프랭스 어느 지역도 안심할 순 없지만, 카르푸르 지역은 완전 무정부 상태다.


한국의 한여름 날씨처럼 무더운 포르토프랭스에선 시체가 썩어 전염병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이티 정부에서 시체들을 계속 치워 날랐다. 신원 확인은 불가능하고, 시신 700구를 큰 구덩이에 한꺼번에 묻곤 한다. 아이티 정부는 16일 현재까지 모두 2만5000구를 묻었다. 미국 군인들이 15~16일 이틀 동안 한 일은 주검 7000구를 묻은 것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200여명의 사람들이 임시로 지내는 텐트촌이 눈에 들어왔다. 지진으로 집이 무너진 사람들을 위해 아이티의 민간복지재단인 오르치디 재단이 긴급히 마련한 곳이다. 현장에 나와있던 브라이스 지오그두니 부이사장은 기자를 붙잡고 “고아원이 무너져 5명의 고아들이 죽었다. 지금 68명의 고아들이 이곳 텐트촌에서 생활하고 있다. 집을 잃은 사람들도 임시로 이곳에 살고 있다. 우리에겐 지금 물, 식량, 약품 등이 필요하다. 이를 외부세계에 널리 좀 알려달라”며 호소했다. 그 속에서도 텐트촌 아이들은 서로 장난치며 천진하게 뛰어놀았다. 멀리서 보면, 마치 야외소풍을 온 것처럼 보일 정도다. 수만명이 매장된 도시임을 순간, 잊게 했다.

아이들에게서 눈을 돌리면 바로 물도, 식량도, 기름도 없는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가게가 조금씩 문을 열고 있지만 이미 물가는 지진 이전의 2~3배, 심하게는 5배까지 뛰기도 했다. 밤이 되면 전기가 없어 깜깜한 암흑천지가 된다. 식수는 원래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올려 썼는데, 전기가 없어 펌프가 작동 안돼 물 사정도 심각하다. 발전소는 어느 정도 복구돼 전기를 내보낼 순 있지만, 배전·송전망이 다 무너져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전기를 공급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단 짐을 푼 속소는 가정용 자가발전기를 돌려 전기와 인터넷을 제한된 시간에 한해 잠시 이용할 수 있지만, 이 숙소도 내일이면 떠나야 한다. 그나마 기사 초고를 보내놓고 찍은 사진들을 보내려다 석유가 떨어지는 바람에 인터넷이 끊겼다. 내일 어떻게 취재를 해서 어떻게 기사를 보내야 할지는, 내일이 되어봐야 안다.

한국의 코이카 단원들과 119구조대원들은 17일 포르토프랭스로 들어온다. 이들은 23일까지 건물 내시경, 탐지견 등 첨단장비를 동원한 매몰자 구조작업과 긴급환자들을 치료할 예정이다. 또 굿네이버스 등 한국의 구호단체와 선교단체 등이 속속 아이티를 돕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러나 아이티에 급파된 도미니카 주재 한국대사관의 최원석 참사관은 “돕는 손길을 막을 순 없지만, 현재까진 아이티 치안이 워낙 불안정해 걱정이 많다”며 “구호물품이 탄 차량은 강도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숙소에 돌아와도 텐트촌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밝은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오면서 바라봤던 아이티의 풍경은 넓은 호숫가, 푸른 산, 맑은 하늘.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아이티는 지옥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포르토프랭스/권태호 특파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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