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밝혔듯이 이번에는 미국의 교육에 대해 느낀 바를 써 보려 한다. 치밀한 학문적 분석이라기 보다 역시 하나의 인상기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을 전제해 두고 싶고 이 역시 미국에 대한 나의 통념과 달랐던 부분들임은 물론이다.
우선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국 가정의 자녀 교육이 매우 보수적이라는 점이었다. 미국인 부모들은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매우 철저히 단속하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식당에서 마구 돌아다니는 아이는 보지 못했고, 쇼핑 마트 같은 곳에서도 뛰거나 소란을 피우면 즉시 주의시키거나 제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국 가정에 초대받아 가 본적도 있는데 그때에도 아이들은 어른들이 먹고 대화하는 곳 근처에서 얼쩡대거나 떠들지는 않았다. 물론 아이들이니 자기들끼리 소리지르고 장난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우리들 한국 가정에서 요즘 흔히 보는 것처럼 손님이나 어른들이 있는 식탁 근처에서까지 예사로 장난치고 음식을 덥석덥석 집어 먹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점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매우 자유분방할 것이라 생각한 미국의 자녀교육에 대한 통념을 깨는 한 대목이었던 것이다.
물론 모를일이긴 하다. 미국의 집안 내부가 우리보다 넓어서 아이들이 어른들 근처가 아니라도 마음껏 놀고 장난칠 장소가 있어서 그런지는... 그러나 내가 본 미국의 어린이들이 우리 한국 어린이들에 비해 훨씬 어리숙하고 순진해 보였다는 사실만은 확언해도 좋겠다. 우리 아이가 다니는 이곳의 초등학교에 부모들을 초대하는 공식 행사가 있어 몇 차례 가 보았는데 아이들이 대체로 수긋하고 어리숙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령, 내가 짧은 영어로 우리 아이하고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을 때도 아이들의 반응은 수줍은 투의 '예스'였고 사진이라도 한장 같이 찍어 주려하면 역시 수줍은 미소를 지은 채 포즈를 취한 것이 화면에 잡혔다. 요컨대 요즘 우리 아이들의 너무 지나치다 싶은 활달함, 그래서 제멋대로이다 싶은 무례함 등은 잘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경우로, 예의 미국 가정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이다. 그날은 크리스마스였는데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클래스 학부모가 고맙게도 자기들 가족이 돌아가면서 주최하는 파티에 우리를 초대해 준 것이다. 그 집 주인 - 은 학부모인 어머니의 여동생 - 은 언니네 가족과 부모를 초대해서 파티를 연 것인데 기억도 못할 여러 요리를 성대하게 차려서 미국 가정의 크리스마스파의 진면목을 보여주었다. 여기서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학교 1학년 쯤 되는 그 집 딸이 어른들 테이블에 합석했는데 내 아내의 옆자리에 앉아 아내의 서투른 영어 대화를 성심으로 들어주고 한국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묻는 등 그야말로 순박하고 천진한 소녀의 모습을 접하게 해 주어 나의 가슴에 오래 자리잡을 기억 한 가지를 만들어 주었다. 그 소녀가 짐짓 꾸미거나 건성으로 우리를 대했거나 또는 외국인이어서 일부러 각별히 예의를 지키고자 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응대가 마음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저절로 우러나온 형태여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아마도 아이들의 이런 순박함은 이곳 부모들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예절 교육에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람들의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 대단해서 학교에서 열리는 아이들의 콘서트 장은 대만원을 이루고 서투른 연주나 합창에도 브라보를 외치며 열렬히 환호한다. 타국에서 온 아이라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빙긋이 짓는 미소로 후의를 표시하고, 우리 아이가 서투른 영어로 뭘 묻거나 하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자상히 응해 주는 것을 종종 보았다. 아이들에게 주는 이 사람들의 사랑의 방식은 내가 본 어린이 이야기 책을 하나 소개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토니'라는 초등학교 4학년쯤 되는 소년이 있다. 학교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피아노 독주를 하게 되어 있다. 까다로운 피아노 레슨 선생님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고 밖에서 놀고만 싶은, 보통의 어린 소년들의 심성을 그대로 지닌 토니는 연습 부족과 긴장 때문에 역시 마무리 부분을 까먹고 말아 자기 순서를 실패로 끝내고 만다. 서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풀이 죽어 집에 도착했을 것이 뻔한 토니. 이때 손자의 연주를 참관하기 위해 나비 넥타이까지 매고 참석했던 할아버지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자동차에서 오래 된 바이얼린을 꺼내 온다. 그리고 그 바이얼린을 아직도 가지고 계셨느냐고 놀라는 아들에게도 학생때 불던 트럼본을 가져 오라고 시킨다. 조율을 해 보고난 할아버지는 손자를 피아노 앞에 앉혀서 손자가 실패한 '말들의 경주'(horses's race)를 합주한다. 어머니는 탬버린을 꺼내 합세하고 그 집의 개까지도 짖어대며 3대가 어우러진 합주는 땀이 날 때까지 몇차례나 신나게 계속되고 손주가 마치지 못한 경주는 그래서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훈훈한 어린이용 소설이다. 아이들의 실수에 관대하고 오히려 이를 격려해 주는 미국식의 전통, 혹은 교육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 책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런 사랑과 관대함 이면에 남에 대한 실례는 엄하게 경계하는, 좋은 의미에서의 개인주의적 규율에 충실한 미국의 전통적 가정 교육이 내가 위에서 언급한 순박한 어린이들, 인간미를 가진 어린이를 키운 토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런 경험 또한 제한적일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 포트 제퍼슨은 앞 선 글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미국의 중류층들이 밀집한, 말하자면 생활 환경이 좋은 곳이고 나를 초대한 학부모는 대표적 중산층이라 할 만한 경제적 여유와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그런 인상을 가능케 했을 것으로 본다(그러나 동생네 집은 중산층이라 하지만 중하층 정도 되어 보이는 서민 가정이라 함이 더 옳을 것 같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런 사정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 가정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이들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 때문에 버릇없고 무례한 아이들이 많은 우리들의 가정 교육을 반성케 한다.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버릇없고 어른들 무서운 줄 모르는 내 아이의 모습을 더러 볼 때가 있어 남의 잘못은 잘 짚어내면서 나 자신의 들보는 못 보는 한국적 아버지의 한 사람임을 가끔씩 절감한다. 그러나 미국의 그런 가정교육, 인성교육은 본받고 싶고 우리 사회에 확산되어도 좋을 덕목으로 지적하는 것은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미국의 인성 교육에 대한 관심은 내가 방문 교수로 와 있는 이곳 스토니브룩 대학의 강의소개서 책자의 서문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대학의 총장은 서문에서 이 대학의 목적은 물론 학업과 전문지식의 섭취, 개인의 계발임을 명시하면서 그 보다는 더 평등의식, 시민의식, 타인에 대한 존경과 관심, 책임감을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세계의 온갖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섞여 있는 미국 대학의 특수성으로 하여 학생들이 잘 융합하여 학문적 성취를 이루기 바라는 최고 책임자의 바램이 섞여 있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 또한 우리 나라의 대학들이 흔히 내세우는 교육 목표를 돌아보게 하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 과문하여 확언키는 어려우나 우리 대학들의 대개의 교육 목표는 세계화에 부응하는 전문인, 요컨대 능력과 실력을 갖춘 인재 양성에만 대체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은가? 물론 아직 국내에서 공부하는 외국인들이 많지 않아 융합이 절실한 사정이 아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진정으로 세계화에 부응하는 인물을 키우려 한다면 대학에서조차 인성 측면에서의 교육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일로 본다. 그러나 우리 대학들은 요즘 우수 학생 유치와 전문가 양성을 위한 무한경쟁에만 몰두할 뿐 이런 점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어 이에 대한 반성과 개선이 절실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가 보건대 미국이 세계의 강국으로 제일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지적한 인성 교육이나 가정교육의 장점이 중요한 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글이 매우 거칠고, 좀 더 논리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성급하게 올린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면서 들르는 분들이 양해하시면서 읽어주시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미국의 교육에 대해서는 장점과 문제점을 통털어 다음에 한 차례 더 언급하여 이 글의 거친 부분을 보완하기를 약속드린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아이들의 이런 순박함은 이곳 부모들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예절 교육에 말미암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람들의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 대단해서 학교에서 열리는 아이들의 콘서트 장은 대만원을 이루고 서투른 연주나 합창에도 브라보를 외치며 열렬히 환호한다. 타국에서 온 아이라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빙긋이 짓는 미소로 후의를 표시하고, 우리 아이가 서투른 영어로 뭘 묻거나 하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자상히 응해 주는 것을 종종 보았다. 아이들에게 주는 이 사람들의 사랑의 방식은 내가 본 어린이 이야기 책을 하나 소개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다. '토니'라는 초등학교 4학년쯤 되는 소년이 있다. 학교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피아노 독주를 하게 되어 있다. 까다로운 피아노 레슨 선생님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고 밖에서 놀고만 싶은, 보통의 어린 소년들의 심성을 그대로 지닌 토니는 연습 부족과 긴장 때문에 역시 마무리 부분을 까먹고 말아 자기 순서를 실패로 끝내고 만다. 서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풀이 죽어 집에 도착했을 것이 뻔한 토니. 이때 손자의 연주를 참관하기 위해 나비 넥타이까지 매고 참석했던 할아버지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자동차에서 오래 된 바이얼린을 꺼내 온다. 그리고 그 바이얼린을 아직도 가지고 계셨느냐고 놀라는 아들에게도 학생때 불던 트럼본을 가져 오라고 시킨다. 조율을 해 보고난 할아버지는 손자를 피아노 앞에 앉혀서 손자가 실패한 '말들의 경주'(horses's race)를 합주한다. 어머니는 탬버린을 꺼내 합세하고 그 집의 개까지도 짖어대며 3대가 어우러진 합주는 땀이 날 때까지 몇차례나 신나게 계속되고 손주가 마치지 못한 경주는 그래서 완전하게 이루어졌다는, 훈훈한 어린이용 소설이다. 아이들의 실수에 관대하고 오히려 이를 격려해 주는 미국식의 전통, 혹은 교육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야기 책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런 사랑과 관대함 이면에 남에 대한 실례는 엄하게 경계하는, 좋은 의미에서의 개인주의적 규율에 충실한 미국의 전통적 가정 교육이 내가 위에서 언급한 순박한 어린이들, 인간미를 가진 어린이를 키운 토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이런 경험 또한 제한적일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 포트 제퍼슨은 앞 선 글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미국의 중류층들이 밀집한, 말하자면 생활 환경이 좋은 곳이고 나를 초대한 학부모는 대표적 중산층이라 할 만한 경제적 여유와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어서 그런 인상을 가능케 했을 것으로 본다(그러나 동생네 집은 중산층이라 하지만 중하층 정도 되어 보이는 서민 가정이라 함이 더 옳을 것 같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런 사정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중산층 가정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아이들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 때문에 버릇없고 무례한 아이들이 많은 우리들의 가정 교육을 반성케 한다.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버릇없고 어른들 무서운 줄 모르는 내 아이의 모습을 더러 볼 때가 있어 남의 잘못은 잘 짚어내면서 나 자신의 들보는 못 보는 한국적 아버지의 한 사람임을 가끔씩 절감한다. 그러나 미국의 그런 가정교육, 인성교육은 본받고 싶고 우리 사회에 확산되어도 좋을 덕목으로 지적하는 것은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미국의 인성 교육에 대한 관심은 내가 방문 교수로 와 있는 이곳 스토니브룩 대학의 강의소개서 책자의 서문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대학의 총장은 서문에서 이 대학의 목적은 물론 학업과 전문지식의 섭취, 개인의 계발임을 명시하면서 그 보다는 더 평등의식, 시민의식, 타인에 대한 존경과 관심, 책임감을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이는 세계의 온갖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섞여 있는 미국 대학의 특수성으로 하여 학생들이 잘 융합하여 학문적 성취를 이루기 바라는 최고 책임자의 바램이 섞여 있는 탓이기도 하겠지만 이 또한 우리 나라의 대학들이 흔히 내세우는 교육 목표를 돌아보게 하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한다. 과문하여 확언키는 어려우나 우리 대학들의 대개의 교육 목표는 세계화에 부응하는 전문인, 요컨대 능력과 실력을 갖춘 인재 양성에만 대체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은가? 물론 아직 국내에서 공부하는 외국인들이 많지 않아 융합이 절실한 사정이 아니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진정으로 세계화에 부응하는 인물을 키우려 한다면 대학에서조차 인성 측면에서의 교육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일로 본다. 그러나 우리 대학들은 요즘 우수 학생 유치와 전문가 양성을 위한 무한경쟁에만 몰두할 뿐 이런 점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고 있어 이에 대한 반성과 개선이 절실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가 보건대 미국이 세계의 강국으로 제일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위에서 지적한 인성 교육이나 가정교육의 장점이 중요한 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글이 매우 거칠고, 좀 더 논리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성급하게 올린 것을 죄송하게 생각하면서 들르는 분들이 양해하시면서 읽어주시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미국의 교육에 대해서는 장점과 문제점을 통털어 다음에 한 차례 더 언급하여 이 글의 거친 부분을 보완하기를 약속드린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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