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팰콘 스콧과 그의 아내 캐슬린의 행복하던 시절 모습 / 사진출처 : 케임브리지대학 부설 ‘스콧 극연구소’
‘비극’ 7달 뒤 남편 생사 모른 채 편지…“당신 때문에 행복해요”
1912년 남극에서 사망한 영국 탐험가 로버트 팰콘 스콧(Robert Falcon Scott)의 아내 캐슬린이 남편의 사망 사실을 모른 채 남편과의 재회를 고대하며 쓴 편지가 15일 공개됐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부설 스콧 극연구소가 지난주 ‘스콧의 마지막 편지’에 이어 공개한 이 부부의 편지는 이날부터 3개월 동안 영국 탐험대의 남극 도달 95주년(1912년 1월17일)을 기념해 일반에 전시된다.
스콧 역시 죽음을 예견하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홀로 될 나의 아내에게’(to my widow)’로 시작하는 편지는 행사 닷새 전 일반에 공개된 바 있다.
15일 영국 일간지 <데일리텔레그래프>는 스콧의 사망(1912년 3월) 소식을 듣지 못한 그의 아내 캐슬린이 남편이 죽은 지 7달이 지난 시점(1912년 10월8일)에서 쓴 편지를 소개했다.
캐슬린은 “이 편지가 앞으로 몇 달 뒤에야 당신에게 도달될지 모르지만 어젯 밤 파티를 했어요”라며 편지를 시작했다. 편지 쓰기 전날 밤 캐슬린이 주최한 파티는 남편의 탐험 활동에 대한 필름 상영이었으며 그 날 행사에는 당시 영국 상류 사회의 유명 인사들을 비롯해 24명이 참석했다. 고몽(Gaumont)사 극장에서 가진 영화 상영에 대해 캐슬린은 "멋진파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모두 놀라워했어요"라면서 "조지 어거튼 경은 얼마나 즐거워하던지 주체를 못하더라구요. 또 루이스 왕자는 펄쩍펄쩍 뛰면서 질문을 쏟아냈죠"라고 썼다. 캐슬린은 남편의 탐험 필름 상영을 오는 토요일에 또 한 차례 열 것이라면서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요"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이어 "너무도 사랑스러운 당신에게 전해 줄 또 한 가지 소식이 있다"면서 남편과 남극 도달 경쟁을 벌였던 노르웨이 탐험가 로알드 아문젠이 먼저 남극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더라도 의기소침해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캐슬린은 "많은 이들은 아문젠이 공정한 게임을 벌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어떤 일이 처음 닥치면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 것 아닌 것이 된다"고 남편을 격려했다. 캐슬린은 스콧이 영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전하면서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 무척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극장에서 필름으로 본 남편의 작은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면서 하루빨리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를 바라는 애절한 심정을 표현했다. 캐슬린이 남편 스콧에게 보낸 마지막 사연은 아래와 같이 마무리된다. “사랑하는 당신, 절대 슬퍼하지 마세요, 인생은 언제나 그토록 멋지니까요. 당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니, 행복하기 그지 없어요. 그리고 우리의 작은 집이 얼마나 멋진지, 내 작품활동은 잘 이뤄지고 있고 내가 잘 지내고 있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또 우리 아들 피터는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리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고대하고 있어요.” 스콧의 아내 캐슬린은? 캐슬린은 1878년 스코틀랜드 목사인 로이드 브루스의 11째딸로 태어나 런던의 슬레이드 예술학교를 졸업한 저명한 조각가이다. 발칸전쟁때 간호사로 일하기도 한 캐슬린은 파리의 아카데미 콜로라시에서 로댕으로부터 조각을 배웠다. 그는 1907년 한 파티에서 스콧을 만나 이듬해 결혼했고, 1909년에는 아들 피터를 낳았다. 캐스린은 1910년 영국 남극탐험대로 떠나는 남편을 따라 뉴질랜드까지 동행했다. 캐슬린은 1913년 2월 귀환하는 영국 남극탐험대를 환영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항해하던 도중에 자신의 남편이 11개월전 남극점 도달 뒤 귀환하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스콧은 사후 영국왕실로부터 기사(knight commander) 작위를 수여받았다. 1922년 캐슬린은 하원의원인 에드워드 힐튼 영과 재혼해, 이듬해 아들 웨이랜드를 낳는다. 영은 이후 남작(baron) 작위를 받고 캐슬린은 남작부인이 되었지만 캐슬린 스콧의 이름으로 조각가로 활동하다가 1947년 세상을 떠났다. 캐슬린 스콧이 만든 남편 스콧의 청동상은 런던 워털루 지역에, 대리석 조각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다. 케임브리지대학 스콧 극연구소 내에는 입구의 스콧 흉상을 비롯해 캐슬린이 만든 다수의 조각작품이 전시돼 있다. 스콧 “나 스스로는 이 여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스콧은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까지 위엄을 잃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스콧의 이런 불굴의 태도는 이후 영국인들의 무한한 존경의 바탕이 되었다. 아래는 스콧이 죽음을 앞에 두고 영국민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의 한 대목으로, 영국에서 널리 회자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이 탐험여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여정은 영국인들이 역경을 견디며 서로를 돕고, 죽음을 강인하게 맞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썼고, 우리가 그럴 것이라는 것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환경은 우리 편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신의 섭리에 경의를 표하며 결연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살아 돌아갔다면, 나는 온 영국인들의 심장을 휘저을 나의 동료들이 겪어낸 역경과 인내, 그리고 불굴의 용기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가지런하지 못한 메모들과 우리들의 주검만이 남아 훗날 그 이야기를 전할 터이지만, 틀림없이 그리고 분명히 우리나라와 같이 위대하고 부유한 나라는 우리들을 의지할 것이라고 믿는다.” (스콧이 영국민에 보낸 마지막 편지) 아래는 캐슬린 스콧이 남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캐슬린은 “이 편지가 앞으로 몇 달 뒤에야 당신에게 도달될지 모르지만 어젯 밤 파티를 했어요”라며 편지를 시작했다. 편지 쓰기 전날 밤 캐슬린이 주최한 파티는 남편의 탐험 활동에 대한 필름 상영이었으며 그 날 행사에는 당시 영국 상류 사회의 유명 인사들을 비롯해 24명이 참석했다. 고몽(Gaumont)사 극장에서 가진 영화 상영에 대해 캐슬린은 "멋진파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모두 놀라워했어요"라면서 "조지 어거튼 경은 얼마나 즐거워하던지 주체를 못하더라구요. 또 루이스 왕자는 펄쩍펄쩍 뛰면서 질문을 쏟아냈죠"라고 썼다. 캐슬린은 남편의 탐험 필름 상영을 오는 토요일에 또 한 차례 열 것이라면서 "사람들이 너무 좋아해요"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이어 "너무도 사랑스러운 당신에게 전해 줄 또 한 가지 소식이 있다"면서 남편과 남극 도달 경쟁을 벌였던 노르웨이 탐험가 로알드 아문젠이 먼저 남극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더라도 의기소침해 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캐슬린은 "많은 이들은 아문젠이 공정한 게임을 벌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서 "어떤 일이 처음 닥치면 대단한 것으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 것 아닌 것이 된다"고 남편을 격려했다. 캐슬린은 스콧이 영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지를 전하면서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상냥하게 대해 무척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극장에서 필름으로 본 남편의 작은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면서 하루빨리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를 바라는 애절한 심정을 표현했다. 캐슬린이 남편 스콧에게 보낸 마지막 사연은 아래와 같이 마무리된다. “사랑하는 당신, 절대 슬퍼하지 마세요, 인생은 언제나 그토록 멋지니까요. 당신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니, 행복하기 그지 없어요. 그리고 우리의 작은 집이 얼마나 멋진지, 내 작품활동은 잘 이뤄지고 있고 내가 잘 지내고 있는 걸 알려주고 싶어요. 또 우리 아들 피터는 얼마나 경이로운지, 그리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고대하고 있어요.” 스콧의 아내 캐슬린은? 캐슬린은 1878년 스코틀랜드 목사인 로이드 브루스의 11째딸로 태어나 런던의 슬레이드 예술학교를 졸업한 저명한 조각가이다. 발칸전쟁때 간호사로 일하기도 한 캐슬린은 파리의 아카데미 콜로라시에서 로댕으로부터 조각을 배웠다. 그는 1907년 한 파티에서 스콧을 만나 이듬해 결혼했고, 1909년에는 아들 피터를 낳았다. 캐스린은 1910년 영국 남극탐험대로 떠나는 남편을 따라 뉴질랜드까지 동행했다. 캐슬린은 1913년 2월 귀환하는 영국 남극탐험대를 환영하기 위해 뉴질랜드로 항해하던 도중에 자신의 남편이 11개월전 남극점 도달 뒤 귀환하다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스콧은 사후 영국왕실로부터 기사(knight commander) 작위를 수여받았다. 1922년 캐슬린은 하원의원인 에드워드 힐튼 영과 재혼해, 이듬해 아들 웨이랜드를 낳는다. 영은 이후 남작(baron) 작위를 받고 캐슬린은 남작부인이 되었지만 캐슬린 스콧의 이름으로 조각가로 활동하다가 1947년 세상을 떠났다. 캐슬린 스콧이 만든 남편 스콧의 청동상은 런던 워털루 지역에, 대리석 조각은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다. 케임브리지대학 스콧 극연구소 내에는 입구의 스콧 흉상을 비롯해 캐슬린이 만든 다수의 조각작품이 전시돼 있다. 스콧 “나 스스로는 이 여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스콧은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까지 위엄을 잃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스콧의 이런 불굴의 태도는 이후 영국인들의 무한한 존경의 바탕이 되었다. 아래는 스콧이 죽음을 앞에 두고 영국민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의 한 대목으로, 영국에서 널리 회자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이 탐험여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여정은 영국인들이 역경을 견디며 서로를 돕고, 죽음을 강인하게 맞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썼고, 우리가 그럴 것이라는 것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환경은 우리 편이 아니었지만, 우리는 불평할 이유가 없었다. 마지막까지 신의 섭리에 경의를 표하며 결연하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살아 돌아갔다면, 나는 온 영국인들의 심장을 휘저을 나의 동료들이 겪어낸 역경과 인내, 그리고 불굴의 용기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가지런하지 못한 메모들과 우리들의 주검만이 남아 훗날 그 이야기를 전할 터이지만, 틀림없이 그리고 분명히 우리나라와 같이 위대하고 부유한 나라는 우리들을 의지할 것이라고 믿는다.” (스콧이 영국민에 보낸 마지막 편지) 아래는 캐슬린 스콧이 남편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이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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