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1989년 체포된 뒤 즉결 처형됐던 트르고비슈테의 군부대. 이곳은 현재 내무부 산하 보안시설로 바뀌었고, 차우셰스쿠가 처형된 내부는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④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처형 현장
④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처형 현장
#1.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서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군부대 앞.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셰스쿠가 1989년 체제붕괴 과정에서 달아나다 붙잡힌 뒤 즉결 처형됐던 곳이다. 1989년 12월 반정부 시위에 맞서 노동자 10만명을 동원해 부쿠레슈티에서 벌인 관제집회는 “차우셰스쿠 타도”라는 구호와 함께 일순간 반정부 시위로 번졌고, 보안군의 무자비한 발포 뒤 사태를 걷잡을 수 없자 차우세스쿠는 헬기를 타고 달아났다.
지난달 18일 부대 바로 옆 트르고베슈떼역 앞에서 만난 루마니아의 택시 기사들은 “정치가들이 다 해쳐먹는다”며 정부에 대한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들의 입을 막던 독재자는 이제 없다. 안톤 니콜라이(67)는 “옛날에는 기차가 늦다고 불평해도 잡아갔지만 이제는 두려울 게 없다”고 말했다.
#2.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기차로 약 2시간반 거리에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댄 작은 도시 소프론. 오스트리아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헝가리인들의 자동차가 이어졌다. 1989년 8월19일, 소풍을 핑계로 몰려들었던 동독인 600여명이 철의 장벽 건너 오스트리아로 넘어갔던 ‘범 유럽 소풍’(팬유러피언피크닉)의 현장이다. 베를린 장벽은 그 뒤 두달도 못돼 무너졌다.
루마니아·헝가리 일상속 뿌리내린 ‘자유’
경제위기에 빈부격차 확대 ‘불만’ 가득 20년 전 자유진영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이곳은 이제 주위에 고속도로가 뚫려 한적해졌다. 아르파드 코바치 소프론 상공회의소 사무국장(35)은 “20년 전에는 개들이 지키고 누가 나타나면 총을 쏴서 죽여도 됐던 국경을 누구나 마음대로 넘나들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 루마니아나 헝가리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독재와 탄압 대신 팍팍한 살림살이다. 트르고베슈떼역 앞 택시기사들은 “사는 게 정글이다. 빚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옛날은 줄을 섰지만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가득찬 물건을 쳐다만볼 뿐이다”고 불평했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도 “가스와 전기가 없어 촛불에 우유를 데워 아이를 먹일만큼 어려웠다”는 과거보다는, 누구나 직장이 있던 젊은 시절을 자주 떠올렸다. 헝가리 특산품인 고추가 가득찬 부다페스트 중앙시장. 과일을 팔던 카탈린(60)은 “돈 없어서 못 사먹고, 휴가도 못가고 일해야 되는데 무슨 자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물건을 사러온 손님은 “맞아, 맞아. 당연히 20년 전이 더 살기 좋았다”고 맞장구를 쳤다. 부다페스트와 부쿠레슈티의 거리에서 비슷한 불만을 수없이 들었다. 통역은 “평범한 헝가리 사람들이 한달에 100만원도 안되는 월급을 받아서, 물가는 한국 수준인 곳에서 살아가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말했다.
의식의 격차는 빈부의 격차만큼 벌어졌다.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쇼핑몰에서 대학생 딸과 고급 핸드백을 둘러보던 디아코느 루미니자(49)는 “누구든 열심히 일하면 기회가 있는데, 잘 살기 원하면서도 일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공산주의 시절 동독에서 만든 낡은 트라반이 굴러다니는 한편에선 최고급 외제 자동차들도 거리를 누볐다.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세계 경제위기 뒤 모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아 겨우 위기를 넘겼다. 루마니아 텔레비전에서는 연신 총리 불신임 관련 뉴스가 흘러나왔다. 1989년 체제전환 이후 처음으로 10월13일 정부가 의회에서 불신임을 받아, 에밀 보크 총리가 퇴진하게 됐다.
크리스토퍼 버르거 헝가리 열린사회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경쟁은 더 사악하지 않으면 가난해지는 시스템인데, 국민들은 아직 스스로의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며 “경쟁의 규칙이 공정하지 않아서 국민들은 경쟁을 꺼려한다”고 말했다. 다니엘 바부 루마니아 브쿠레슈티대 정치연구소장은 “중공업 등 중추적 산업을 외국에 팔아넘겼고, 정치 엘리트들의 전문성 결여가 오늘의 혼란을 낳고 향수만 부추겼다”며 “법과 제도에 기초한 정의가 확립되려면 20~40년은 더 걸릴 것이다”고 내다봤다.
부다페스트·부쿠레슈티/글·사진 김순배 기자marcos@hani.co.kr
1989년 동독인들이 철의 장벽을 넘어갔던 ‘범유럽소풍’의 현장인 헝가리-오스트리아의 국경 쇼프론. 아르파드 코바치 쇼프론 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경제위기에 빈부격차 확대 ‘불만’ 가득 20년 전 자유진영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이었던 이곳은 이제 주위에 고속도로가 뚫려 한적해졌다. 아르파드 코바치 소프론 상공회의소 사무국장(35)은 “20년 전에는 개들이 지키고 누가 나타나면 총을 쏴서 죽여도 됐던 국경을 누구나 마음대로 넘나들게 됐다”고 말했다. 이제 루마니아나 헝가리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독재와 탄압 대신 팍팍한 살림살이다. 트르고베슈떼역 앞 택시기사들은 “사는 게 정글이다. 빚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옛날은 줄을 섰지만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가득찬 물건을 쳐다만볼 뿐이다”고 불평했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도 “가스와 전기가 없어 촛불에 우유를 데워 아이를 먹일만큼 어려웠다”는 과거보다는, 누구나 직장이 있던 젊은 시절을 자주 떠올렸다. 헝가리 특산품인 고추가 가득찬 부다페스트 중앙시장. 과일을 팔던 카탈린(60)은 “돈 없어서 못 사먹고, 휴가도 못가고 일해야 되는데 무슨 자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물건을 사러온 손님은 “맞아, 맞아. 당연히 20년 전이 더 살기 좋았다”고 맞장구를 쳤다. 부다페스트와 부쿠레슈티의 거리에서 비슷한 불만을 수없이 들었다. 통역은 “평범한 헝가리 사람들이 한달에 100만원도 안되는 월급을 받아서, 물가는 한국 수준인 곳에서 살아가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말했다.
헝가리-루마니아 GDP 성장률 및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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