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1 13:25
수정 : 2019.12.21 13:32
|
19일 일본 도쿄 신주쿠구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치매 간호’ 심포지엄에서 두 나라의 치매 환자 가족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
[토요판] 조기원의 100세 시대 일본
⑬ 한·일 치매 당사자와 가족의 만남
아내 혼자 간병해온 일본 남성
‘외톨이 안 되게’ 메모 발견
어머니 돌보고 있는 한국 여성
“치매 처음에 못 받아들였다”
한·일 치매 가족 심포지엄에서
청중들 공감하며 고개 끄덕
가족에게 지나친 부담은 공통 과제
|
19일 일본 도쿄 신주쿠구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치매 간호’ 심포지엄에서 두 나라의 치매 환자 가족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
‘외톨이가 되지 않게 해주세요.’
올해 68살인 다카사와 다모쓰는 아내가 인지증(일본에서 치매가 모욕적인 표현이라는 이유로 변경한 명칭) 진단을 받은 2006년 아내의 물품을 정리하다가 이런 내용이 적힌 메모 수십장을 발견했다. 아내는 56살 때 장년층 인지증(65살 이하일 때 발병한 인지증) 진단을 받았다. “인지증 때문에 외로움이 이토록 강했구나. 아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었는데 나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아내의 바람대로 그는 되도록 아내를 혼자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다. 아내가 인지증 진단을 받은 지 3년 만인 2009년, 그는 아내 간병에 집중하기 위해 직장에서 조기퇴직했다. 세월이 흘러 2014년 더는 아내를 혼자서 목욕시키기도 힘들 정도가 되어서 고민 끝에 아내를 시설에 입소시키기로 결심했다. 아내가 시설에 들어간 뒤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하다 한 가지를 다짐했다. ‘매일 아내가 있는 곳에 얼굴을 비치겠다.’ 이 약속은 지금도 지키고 있다. 식사하는 시간 외에는 거의 누워서 지낼 정도로 상태가 악화된 아내의 마지막을 어떻게 지킬지를 그는 최근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치매 당사자 증언으로 주목받아
지난 19일 일본 도쿄 신주쿠구에서는 한국치매협회와 일본 ‘인지증의 사람과 가족회’(이하 인지증과 가족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한국과 일본 치매 간호’ 심포지엄이 열렸다.
한국에서는 언니,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는 장아무개씨가 단상에 올랐다. 어머니가 치매 판정을 받았다는 장씨는 “어머니가 치매 환자라는 사실을 처음에는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엄마는 예쁜 치매다. 착한 치매다. 가만히 있으면 잘 모른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 어머니가 이상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약을 챙겨주면서도 치매 환자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가) 너무 미웠다”고 덧붙였다. 장씨는 “엄마가 올해 3월에 쓰러져 입원하고 나서 간호를 하면서 그때 알았다. 엄마는 아프구나. 그러면서 엄마에 대한 미움도 줄어들었다. (치매 환자 가족) 자조 모임에 나가고, 치매에 대해서 공부도 하면서 우리 가족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장씨가 체험을 이야기할 때 단상 아래에서 이야기를 듣던 일본 참석자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를 짓기도 했다.
서로 체험을 이야기한 뒤 다카사와는 “나라는 달라도 공통점이 정말 많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장씨는 “저는 감성적인 부분으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일본 사례를 들으면서 좀 더 현실적으로 앞으로 어머니 상태가 더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할지 준비하고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일 치매 환자와 가족 만남 행사는 한국치매협회가 일본 인지증과 가족회에 공동 행사를 제의해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로 열렸다. 인지증과 가족회는 일본 인지증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단체다. 1980년 교토에서 인지증 환자를 돌보는 가족들이 서로 모이자고 결의했고, 이를 <교토신문>이 보도한 것이 시작이었다. 일본 전국지들도 인지증 환자 가족 모임에 대해서 보도했고, 전국에서 가족들이 모였다. 현재는 일본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인 47개 도도부현에 지부가 있고, 회원 수 1만1000명이 넘는 큰 단체로 발전했다.
초기에는 인지증 환자를 돌보는 가족을 위한 모임 성격이 강했다. 80년 교토에서 단체가 결성될 당시 이름은 ‘어리석은 노인을 돌보고 있는 가족회’였다. 현재 일본에서 인지증에 걸린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일반적인 표현이었다. 의학적 용어는 ‘지호’였는데, 한국의 치매와 한자가 같고 발음만 다르다.
당시 일본에서 인지증에 걸린 고령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거나 집에서 가족이 온전히 돌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 초기에는 가족들만의 단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과 같은 ‘데이 케어’(주간 보호시설) 같은 서비스는 없었다. 그래서 인지증 환자 가족이 모두 짊어진 무거운 짐을 더는 게 급선무였다. 스즈키 모리오 인지증과 가족회 대표는 “가족회 설립 당시 나는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 있는 병원의 상담원이었다. 당시는 인지증 가족들이 간병 부담을 모두 떠안는 상황이었다. 제도적 뒷받침이 없으니까 그저 가족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단체가 생긴다고 했을 때 전문 인력으로 가입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인지증 환자를 위한 제도가 조금씩 정비되면서 인지증과 가족회는 인지증 환자 자신들의 목소리에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교토에서 열린 국제알츠하이머병협회 국제회의 때 치매 당사자인 오치 ?지가 자신의 경험담을 발표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당시 오치는 2000자 정도 원고를 15분가량 또박또박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나는 57살(2004년 당시)입니다. 잘 잊어버리는 병에 걸려서 상당히 고통스러운 시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데이(케어 서비스 시설) 동료와 웃고, 가족에게는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잘 잊어버리지만 여러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안심하고 보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가 연설을 마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후 인지증 환자 자신이 당사자 시점으로 제도 개선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늘었다. 인지증과 가족회도 최근에는 장년층 인지증 당사자 모임을 많이 주선하고 있다. 39살 때 인지증 진단을 받았으나 현재는 인지증 강연 등 각종 활동을 하면서 유명해진 단노 도모후미도 가족회가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스즈키 대표는 “여전히 가족 지원 문제는 중요하다. 인지증 당사자와 가족 양 바퀴가 정책 수립에 모두 필요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일본 ‘인지증의 사람과 가족회’ 대표 스즈키 모리오는 “정부가 치매 예방을 강조하면 (인지증에 걸린 것이 본인 책임이라는) 자기책임론 풍조가 강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1980년에 설립된 이 단체의 회원 수는 1만1000명을 넘는다.
|
치매 자기책임론 풍조 반대
인지증과 가족회는 일본 정부의 정책에 일정 부분 제동을 걸 수 있을 만큼 영향력을 키웠다. 가족회를 포함한 관련 단체가 꾸린 ‘인지증 관계 당사자·지원단체 연락회’는 지난 5월 일본 정부가 예방을 통해 70대 중 인지증 환자 비율을 2025년까지 6% 줄이겠다는 목표를 제시하자, 이를 반대했다. 스즈키 대표는 “국제적으로도 인지증이라는 병이 어떤 원인 때문에 걸리는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예방, 예방 하면 인지증에 걸린 이는 예방을 게을리한 것이 아니냐는 편견이 퍼진다. (인지증에 걸린 것이 본인 책임이라는) 자기책임론 풍조가 강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인지증 당사자들과 가족이 반대 목소리를 내자 일본 정부는 한달 만에 수치 목표를 철회했다.
이날 대회에서는 양국 모두의 과제도 엿볼 수 있었다. 쓰도메 마사토시 리쓰메이칸대 산업사회학부 교수는 “가족 간병자에 대한 특정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가. 젊고 힘이 있고 시간도 있는 그런 사람을 상상하기 쉬우나 현실은 일본의 (전체) 간병자 절반은 65살 이상 고령자다. 프랑스 역사학자가 일본은 사회보장 분야에서 가족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고 지적했다. 가족을 간병을 하는 인적 자원으로 보고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일본이라는 단어를 한국으로 바꿔도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는 말이다.
도쿄/글·사진 조기원 특파원 garden@hani.co.kr
▶ 일본 특파원. 지난해 기준 일본은 총인구 1억2652만9천명 중 65살 이상이 28%(3547만1천명)인 초고령화사회입니다. 일본 사회를 취재하다보면 뉴스 대부분의 배경에 고령화 현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도 머지 않아 겪게 될 현실이기도 합니다. 초고령화사회 일본에서 보고 느낀 소소하지만 의미있는 삶의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