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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성애 전시를 금지합니다

등록 2021-09-14 20:59수정 2021-09-15 02:33

[MZ커뮤니티 보고서] 이자연ㅣ대중문화 탐구인

그간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개 가상세계의 무의미한 것으로만 여겨져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의 역사도 어언 20년을 뛰어넘었다. 어느덧 커뮤니티가 없는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생겨나고, 누군가는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외집단을 이곳에서 학습한다. 커뮤니티에 정착한 이들은 익명성을 빌려 무의식을 진솔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기에 늘 한결같아 보이는 온라인 세상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특히 여성주의 대중화에 따라 여초 커뮤니티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개정하기를 반복했는데, 그중 하나가 ‘연애와 결혼 전시’ 금지다.

한 커뮤니티에서는 이성애 전시 금지를 공식적 규율로 내걸기도 했다. 구·현 남자친구와 남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게시판을 하나로 축소하고 그곳을 제외한 곳에서는 이성애를 주요 소재로 삼지 못하도록 했다. 과거의 연애와 결혼 생활로부터 이어지는 고통을 호소하는 건 수용하지만, 이성애적 관계를 다른 여성들에게 무작정 노출하는 건 지양하고 있었다. 다른 커뮤니티도 비슷하다. 규칙으로 내걸지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이성 주제를 피했다. ‘굳이 남자 이야기를 해야 하나?’ 2030 여성들의 의문은 점점 커져갔다.

규칙은 곧 분위기를 형성한다. 이성애 전시를 금하니 여성들은 그것을 제외한 다른 소재에서 다양한 재미를 찾아 활발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과거 커뮤니티 여성 이용자들이 거의 모든 영역을 연애로 연결했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주어로 삼는 데 몰두한다. 유행도 바뀌었다. ‘남자친구를 위한 6단 도시락 싸기’, ‘짝남을 유혹하는 향수 추천’ 등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고 도파민 디톡스, 골반 교정 요가, 텔레스테이션 게임(댓글로 이야기가 어떻게 와전되는지 보는 게임) 등 다채로운 아이템이 뜨거운 인기를 얻는다. 각기 목적도 카테고리도 모두 다르지만 딱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다른 누가 아닌, 나 자신을 즐겁고 이롭게 한다는 점.

“도대체 그 나이 때에 연애 안 하면 뭘 하니?” 어느 회식 자리에서 기혼 상사가 물었다. 젊을 때 이성을 많이 만나봐야 한다며 연애를 적극 장려했다. 주변 동료를 슬쩍 보니 모두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침묵의 의미를 잘 안다. 이젠 연애 앞에 ‘굳이’를 붙이는 세상이다. 심지어 온라인에선 그걸 규제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 익명의 여성이 쓴 질문을 봤다. “주말에 혼자 차박 캠핑할 건데 어닝 필요할까?” 문득 궁금하다. 그날 내가 들은 두 질문 중 여성을 진짜 자유롭게 하는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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