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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곽두팔씨, 택배 왔습니다

등록 2021-10-05 18:08수정 2021-10-06 02:32

[MZ커뮤니티 보고서] 이자연ㅣ대중문화 탐구인

‘곽두팔’이라는 이름을 들어봤는가? 그로 말하자면 이름에서부터 거칠고 강인한 인상이 팍팍 느껴져 남들이 쉽게 얕보지 못하는 가상 인물이다. 2018년 즈음부터 여초 커뮤니티에는 1인 가구 여성을 대상으로 택배를 받을 때 남성 이름을 사용하라는 생활 정보가 널리 퍼졌다. 실제로 ‘××빌라 301호 가슴 큰 ×’이라고 문자를 잘못 보낸 배달 기사 이야기가 떠들썩했고, 피해자 집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택배 송장을 뒤졌다던 김태현 사건에 많은 이들이 여전히 불안을 느꼈다. 끝이 아니다. 코로나19 이후엔 출입명부를 보고 관심 있다며 불쑥 연락하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마저 들려온다. 여성들은 현관 밖에 노출된 개인정보를 지우고 곽두팔 뒤로 꽁꽁 숨고 싶었다.

곽두팔에 관한 기사가 처음 나갔을 때, 여성 대부분의 반응이란 속 시원함보다 두려움에 가까웠다. 이 전략이 알려질수록 혹여 자신의 가명도 노출될까 염려했다. 그 기점으로 여성들 사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한 유형의 질문이 속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름, 택배 수신용으로 그럴듯해 보여?” 그리고 어디서나 볼 법한 이름으로 가득한 댓글들. 준수, 현욱, 창민 등. 이들은 평범한 나머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이름을 찾았다. 2030 여성들은 더 현실적이고 평범한 남성이 되고 싶었다. 나날이 커져가는 불안에 유일한 보호 수단은 이렇게 진화되어갔다.

인상 깊은 것은 이젠 무난하지만 똑똑하고 예민한 이미지의 이름을 찾는다는 것이다. 곽두팔이 물리적으로 강하고 센 이미지를 응축시킨 가상 인물이라면 이제는 정보사회의 피라미드에서 우위를 점할 듯한 이름을 찾고 싶어 했다. 이러나저러나 공통점은 그대로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 여성들은 그걸 갈망했다. 실제로 남성 이름으로 바뀐 뒤에 택배나 배달을 받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는 후기도 자주 등장한다.

안전을 확신할 방법은 계속해서 확장됐다. 송장을 쓰레기봉투에 버린 뒤에도 안심할 수 없어 개인 파쇄기를 구매해 갈아버린다는 이야기도 적지 않고, 터보 라이터로 흔적을 없앤다는 후기도 있다. 송장에 ‘이*연’으로 나온다는 점에 착안해서 강해 보이는 이름 끝자리만 공유하는 건 덤이다. 누군가 말했다. “이런 말 좀 그렇지만 코로나19라 다행이지. 이젠 비대면 배송이라 집 앞에 두고 가는 게 흔해졌으니까.”

여성들이 남성 가상 인물의 이름을 만들어낸 역사는 과거부터 있었다. 반휘혈, 지은성, 신은규 등 낭만과 사랑을 담아 인터넷 소설 주인공을 그려내던 이름들. 그리고 2021년, 우리는 또다른 소원을 담아 이름을 짓는다. 제발 나를 모르길. 여기 혼자 사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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