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끝자락에서 떠나온 실낱같은 작은 별빛이 억겁의 어둠을 뚫고 우리에게 닿는다. 인간들이 연출하는 온갖 불의와 거짓과 폭력이 아무리 짙은 어둠의 장막을 겹겹이 둘러쳐도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빛을 비추는 분이 오시면 아침 햇살에 이슬 사라지듯 순식간에 말라 자취를 감출 것이다. 빛의 축제 크리스마스가 몹시 기다려진다.
강우일 | 베드로 주교
조금 있으면 팥죽을 먹는 동지가 온다. 동지는 일년에 해가 제일 짧고 어둠이 제일 긴 날이다. 어둠은 항상 우리를 두렵게 하고 움츠러들게 해왔다. 햇빛이 충분히 비추지 않으면 모든 생명이 활력을 얻지 못한다. 어릴 때 컴컴한 골목길을 걷게 되면 무서워서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지나갔다. 인류 역사에서 안 좋은 일은 주로 어둠 속에서 이뤄졌다. 반란과 기습은 밤에 주로 시작되었다. 5·16 쿠데타도, 12·12 쿠데타도 밤에 시작되었고, 일본의 진주만 공격도, 북한의 6·25 남침도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났다. 어두운 밤에 안 좋은 기운이 설치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도 밤이 제일 긴 동지에 삿된 귀신을 몰아내기 위해 태양을 상징하는 붉은색의 팥죽을 먹었던 모양이다.
조금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온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축제다. 그러나 성서 어디에도 예수님이 12월25일에 태어나셨다는 이야기는 안 나온다. 교회의 역사적 전승에도 예수님이 언제 태어나셨는지 전해주는 정보는 없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교는 12월25일을 예수님 탄생일로 정하고 경축해왔을까? 고대 로마 제국 시대에 12월25일은 태양신의 축일이었다. 고대 로마나 이집트 제국 사람들은 한해에 밤이 제일 길었다가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 시기에 어둠을 이긴 ‘무적의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축제를 벌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날 절대 권력의 상징인 로마 제국의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신, 억압받는 이들에게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빛을 비추시어 권력자들의 불의와 폭력의 어둠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그리스도 탄생 축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인류를 짓누르던 온갖 어둠을 몰아낸 참된 빛의 탄생을 경축하는 축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상업화의 물결에 파묻혀 연말 대목을 극대화하는 돈벌이 기회로 전락했다. 상인들은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갈수록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로 번화가를 장식하고 밤거리를 환하게 비춘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빛은 장식품이 아닌 빛 자체이신 구원자의 도래를 알리는 상징이다. 오늘 우리는 휘황찬란한 조명에서 나오는 기계적인 빛이 아니라 세상을 뒤덮은 어둠의 심연을 밝히는 영적인 빛을 필요로 한다.
세계 최대의 경제력과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과 중국, 러시아는 최근 세계를 움켜쥐는 패권을 놓고 서로 팽팽한 긴장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은 동남아 해역에서, 대만 상공에서 전함들과 전투기들을 다수 출동시켜 자국의 군사력을 과시하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병력을 집결하고 언제 실력행사에 나설지 모르는 상황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서쪽에서는 나토 가맹국들과 함께, 동쪽에서는 일본과 동남아 국가들과 함께 이에 맞서 유사시에는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엄중한 경고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마치 조폭들이 서로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더 확대하고 선점하기 위해 위협적인 경고를 날리며 언제라도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 같다. 어느 쪽도 국제정치적 정당성과 도덕성을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오만한 고집 때문에 위험천만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시작하든 한번 단추를 누르면 중지할 수도 없는 종말적 난타전이 야기될 것이다. 그러나 유엔도 이러한 긴장을 완화하고 대화와 협력을 중재할 수 있는 역량이 안 보인다. 어둠이 참으로 짙게 깔려 앞이 안 보인다.
코로나바이러스의 팬데믹 상황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전 지구적 재난을 초래하고 있다. 백신도 거듭 맞았으나 바이러스는 우리를 조롱하듯 새롭게 변이종을 탄생시키며 방역망을 뚫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바이러스의 확산을 최대한 저지하려 했지만, 경제활동이 마비되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제한당하고 교육과 이동의 기본권을 침해당하는 삼중고에 시민들이 견디지 못하고 비판과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비축한 게 전혀 없는 가난한 계층일수록 더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책 결정자들도 우왕좌왕하다 어쩔 수 없이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형국이다. 어둠이 누리를 뒤덮고 있어 참으로 캄캄하다.
21세기에 들어서고 21년이 지난 금년 2월 미얀마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행정수반을 내쫓고 항의하는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억압하는 야만적 정권 탈취 사태가 전개되어 온 세상이 경악하였다. 미얀마 시민들은 이러한 군인들의 무법적인 정권 찬탈에 저항하며 국제 사회가 개입하여 유엔평화유지군을 파견하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연대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10개월이 지나도록 유엔은 아무런 해결책도,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다. 미얀마 시민들은 지금도 매일 군사독재정권의 폭력과 탄압에 굴하지 않고 외로운 저항과 시위를 계속해오고 있으나,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군인들은 최근에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무기와 장비를 주인인 국민에게 겨누며 동물을 사냥하듯 폭력적인 진압과 공격을 이어가고 있다. 역사를 뒷걸음치게 하는 비민주적 폭거가 발발하여 300일이 훨씬 지나고, 1300명에 이르는 시민이 살해되는 참상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국제 사회의 어느 나라도 실제적인 도움의 손길을 뻗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세상이 어둡기만 하다.
이 나라의 대선 정국은 한마디로 혼돈의 소용돌이다. 투표일이 100일도 안 남았는데 여야 후보의 지지율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고, 아직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시민들이 과반수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 갈등에 시달리면서 양 진영 모두 상대를 향한 무조건적인 비난과 대결 구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사회 현실에 대한 이성적, 객관적 진실과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여야 할 언론이 시민들에게 올바른 식별의 잣대를 제공하기보다는 진영논리를 증폭시키거나 편향되고 왜곡된 정보를 남발하는 세태에
편승함으로써 시민들은 오리무중에 빠져 판단의 기준을 상실하였다. 사회의 등불이 되어야 할 언론이 온갖 거짓 뉴스와 정보의 미세먼지로 뒤덮여 어둠을 밝혀줄 빛줄기가 안 보인다.
사방팔방이 칠흑같이 어둡다. 그러나 어둠이 아무리 깊어도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한다. 우주의 끝자락에서 떠나온 실낱같은 작은 별빛이 억겁의 어둠을 뚫고 우리에게 닿는다. 인간들이 연출하는 온갖 불의와 거짓과 폭력이 아무리 짙은 어둠의 장막을 겹겹이 둘러쳐도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빛을 비추는 분이 오시면 아침 햇살에 이슬 사라지듯 순식간에 말라 자취를 감출 것이다. 빛의 축제 크리스마스가 몹시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