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 소설가
작년 늦가을에 동료 소설가에게서 나를 돌아보게 하는 질문을 받았다. 어떤 질문은 정해진 답 대신 답을 고민하는 시간만을 제공하는데 그 질문이 그러했다. 동료는 내게 물었다. 모종의 사회적 현장에 갈 때면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언젠가 소설에 쓸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곤 하는데 내게도 그런 두려움이 있느냐고. 떠오르는 문장이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뒤 ‘자기순환적’인 슬픔에 갇힌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쓴 바 있다. “나는 이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결국 문학이 되고 말까봐 두렵기 때문에. 혹은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애도일기>) 바르트의 이 문장에 매혹된 적이 있고 타인의 고통에 관한 한 늘 자격을 의심하는 인물을 써왔는데도 ‘문학이 되고 말까봐 두려운’, 그러니까 전적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내 작업을 바라보는 감각에 대해서는 그동안 내가 무뎠다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이용일 수도 있고 대상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글 쓰는 자의 이기적인 한계 말이다. 내게 2021년은 그런 한 해였다.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종종)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라는 고민을 이겨왔던 지난 16년의 작가 생활을 돌아보게 하고 뒤늦게 후회도 해야 했던 한 해…. 아무도 없는 들판에 서서 끝내 알아낼 수 없는 바람의 결을 추적하는 사람처럼 부재하는 답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2022년이 되었다. 2022년이라니, 에스에프(SF) 소설이나 영화에서 미래로 설정한 연도 같기만 해서 한참을 곱씹게 된다. 새해가 되었다고 해서 새로운 다짐과 계획을 리스트로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처음 문학을 하겠다고, 아니 하고 싶다고 열망을 키웠던 날들을 떠올리고 있다. 모든 작가가 출사표를 던질 때는 그 욕망이 뜨겁고 순수했을 것이다. 문학이 무엇을 해줄 거라는 기대나 계산 없이, 그저 대책 없이 빠져들고 말았던 시간…. 문학이 아닌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세상이 내게만 혹독하고 작은 희망마저 빼앗아간다는 절망적인 슬픔에 빠질 때마다 그 최초의 마음을 떠올려보는 것이 힘이 되는 순간도 있으리라. 물론 ‘희망 자체가 불평등하게 분배된’(사라 아메드, <행복의 약속>) 지금 시대에서 어떤 위안은 기만적이겠지만 원망마저 터널처럼 지나가면 다시 우리를 살게 하는 숨이 있으리라 믿고 싶다.
연말과 새해를 맞아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메시지를 몇번인가 보냈다. 행복하라든지 행복을 빈다는 흔한 메시지였는데,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내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행복의 형태와 성분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됐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운(chance)을 의미하는 중세 영어 ‘hap’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사람들에게 바란 건 운의 실현일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혹여 지배계급의 평온을 유지하게 하는 사회적 행복과는 거리가 먼, 순진한 기호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 이런 생각은 너무 복잡하다. ‘건강해서 다시 만나자’는 의미가 내포된 ‘건강하십시오’(황정은, <일기>)에 가까웠고, ‘상처투성이의 삶을 통해 상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모순의 별’(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에서 태어난 한 인간으로서 짧은 순간이나마 웃기를 바라는 진심이 담겨 있기도 했다.
재작년에 이어 작년에도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크고 작은 파고와 싸워야 했다. 새해에는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 위해서라도 그저 건강하시기를, 서로의 상처를 발견하며 이전까지 미처 몰랐던 또 하나의 자세를 함께 알아가기를, 무엇보다 진짜 행운이 최대한의 크기로 각자의 삶에 깃들기를, 문장의 힘에 기대어 이렇게나마 새해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