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너무도 투명한 성채

등록 2022-05-01 15:11수정 2022-05-02 02:39

조해진 | 소설가

친구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지막 칼럼이니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 친구(K)는 1990년생으로 내 친구 중 가장 어리다. 나는 케이를 통해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청년의 얼굴을 몇년에 걸쳐 지켜볼 수 있었다. 나 역시 지나온 시절이지만 마흔 무렵이 되면서 언뜻언뜻 잊고 살던 그 시절을 케이를 보며 수시로 상기했다고 해야 할까. 케이는 취업보다는 문학에 더 큰 열망을 갖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선택을 했고(언젠가는 다시 소설이나 시를 쓰리라 믿는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취업준비를 하다가 1년 전에야 소규모 출판사에 입사했다. 케이는 직장 근처에 방 한칸을 얻기도 했는데, 열평도 안 되는 그 방 월세에 임금의 삼분의 일이 들어간다고 말한 적 있다. 그날 케이는 줄일 수 있는 게 식비뿐이어서 저녁은 김밥으로 때울 때가 많다는 이야기도 했다.

케이가 청년세대의 대표는 아니지만 내 삶에서는 그렇다. 그래서인지 나는 종종 케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최근 국무총리, 비서실장, 여러 장관 후보자들 대부분이 기업이나 무슨 협회의 사외이사와 고문, 비상임이사로 활동해왔다는 기사를 접하고는 더 그랬다. 사외이사, 고문, 비상임이사 등이 정확하게 어떤 일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시에 출퇴근하는 노동자가 아니란 건 그 직함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하루 몇시간의 노동을 채우지 않아도 노동자 평균임금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다가 그 직함을 이력으로 다시 공직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되는 그들만의 성채…. 부동산 투자로 재산을 불리고 자녀 입시나 입사에서 특혜를 받는 건 그 성채에서는 보편적인 삶의 일부로 보였다.

이태승의 <근로하는 자세>라는 소설집의 표제작에는 환경회의로 독일 출장 중이던 환경부 차관이 학센(독일식 족발 요리) 식당을 찾자 과장과 사무관, 산하기관 연구원 등이 줄 서서 수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들은 식당으로 이동하다 무장단체에 피랍되는데, 처음에는 차관이 숨진 듯이 서술되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그 현장에서 죽은 이는 사무관인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상치 못한 위급 상황에서 차관이 아닌 공무원이 희생된다는 건 소설의 설정인 동시에 우리 현실에 어울리는 결말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물론 모르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재산과 임금에 따른 계급은 필연적이고, 관료사회에서 직급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것도 어느 나라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지 않을까. ‘근로하는 자세’ 없이도 성채 안에서 안온하다면 적어도 그에 대한 부채감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그 부채감과 부끄러움이 공존을 위한 시선과 행동으로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칼럼을 쓰기 전, 나는 케이에게 너의 이야기를 써도 되느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케이는 좋다고 대답한 뒤 마침 이사 직후라 짐 정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제야 전세자금 대출이 가능해져 방 두개와 거실이 따로 있는 전셋집을 구하게 됐는데, 내가 연락한 날이 마침 이삿날이었던 것이다. 케이와 곧 축하파티를 하기로 하고 메시지를 마무리했다. 알고 있다, 대부분의 케이가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그만큼 고생하기도 한다는 걸, 나 역시 그러했듯이. 그러나 그 케이들에게 투명하게 욕망이 내비치는 저곳의 성채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나는 감히 묻지 못할 듯하다. 하긴, 케이나 나 역시 누군가에겐 또 다른 성채, 작지만 상대적으로 풍요로워 보이는 성채에 소속된 사람들일지 모르겠다. 그것을 잊지 않으려 다만 애쓸 뿐이다. 소설을 읽고 쓰는 사람이어서 이런 생각도 하게 됐다는 것도….

좋아하는 소설과 함께 세계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늘 이 지면에 고마웠다. 아마도 오랫동안 그리울 것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